갑신정변(甲申政變)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속국(屬國)의 예의를 갖추도록 요구하였지만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관해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는데,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 이래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이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였다. 또 조선은 일본의 힘으로 점차 개명(開明)해 나아갔으므로, 이처럼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선은 마침내 청나라의 속국이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실력으로 조선에 세력을 다져 일본의 세력을 배척하려고 하였다. 메이지 15년의 변란을 기회로 삼아 청나라는 종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조선 정부에 중국인 및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함으로써 그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간섭하고, 자국의 군대를 경성에 머물게 하여, 한국 조정을 위협하였다. 또한 조선의 군대를 모두 청나라 식으로 훈련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앞 과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 전해 【메이지 14년】 에 조선의 신사(紳士)들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또한 임오변란(壬午變亂) 후 【메이지 15년 10월】 에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과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이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일본을 모방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문명을 수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 무렵부터 조선의 정치가들 가운데에는 자연히 두 파가 생겨났다. 하나를 사대당(事大黨)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를 독립당(獨立黨)이라고 한다. 사대당은 곧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국정을 장악하려는 사람들로, 주로 보수(保守)에 속하는데, 민씨 일족과 그 외의 사람들이 그에 속하였다. 독립당은 일본의 힘에 의지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청나라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그 우두머리들이었다. 이들 두 파는 서로 알력이 끊이지 않았는데, 메이지 17년 6월 이래 청나라는 안남(安南) 문제에 관해 프랑스와 갈등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복주(福州), 대만(臺灣) 등에서 전투를 벌여 동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이 기회에 독립당은 일을 벌이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이 태왕 21년 3월 【메이지 17년 4월】 에 우정국(郵征局)이 신설되어 홍영식(洪英植)이 총판(總辦)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 오후 6시경부터 개국(開局) 연회를 열고, 홍 국장의 명의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미국 공사 후트(Foote)와 기타 외국 사신들을 비롯하여 조선의 고관 십 수 명을 초대하였다. 다케조에 공사는 몸이 편찮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연회가 한창일 때 주변에 불이 나자, 손님 일동은 놀라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으며, 우영사(右營使) 민영익이 먼저 문을 나서자, 문 밖에서 숨어 있던 흉도에게 상해를 입게 되었다. 독립당은 일거에 반대당을 소탕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하자 김옥균과 박영효 두 사람은 곧장 서둘러 창덕궁으로 가 침전(寢殿)에 들러 국왕에게 소란이 일어나 위기가 닥쳤음을 알리고 왕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으며, 동시에 사신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왕명(王命)으로 급히 대궐을 수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다케조에 공사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국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왕은 다시 계동궁(桂洞宮)으로 옮겨 갔다. 이 사이에 왕명으로 민영목(閔泳穆), 【외아문 독판(外衙門督辨)】 민태호(閔台鎬), 【내아문 독판】 한규직(韓圭稷), 【전영대장(前營大將)】 윤태준(尹泰駿), 【후영대장(後營大將)】 이조연(李祖淵), 【좌영대장(左營大將)】 조영하(趙寧夏) 【이조판서】 등 반대파의 우두머리들을 불러, 그들이 도착한 즉시 그들을 살육하고 이재원(李載元), 【좌의정이 되었다.】 홍영식(洪英植), 【우의정이 되었다.】 김옥균(金玉均) 【호조판서가 되었다.】 등이 주요 국가기관을 장악하였다. 【이상은 모두 17일 밤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리하여 새 정부의 조직이 이루어지고, 왕은 이튿날인 18일 【양력 5일】 저녁 무렵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사대당 사람들은 원세개(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므로, 19일 【양력 6일】 에 이르러 청나라 장수 원세개, 오조유(吳兆有)가 군대를 이끌고 왕궁의 동쪽인 선인문(宣人門)으로 들어오자, 문 안에 있던 조선 군대는 그들과 화합하여 함께 탄환을 발사하였다. 왕 쪽에 탄환이 날아들어 위험은 말할 수 없었다. 일본군도 역시 그에 대응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이때 왕궁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 혼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방어에 힘을 쏟았지만, 왕궁 내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공사는 국왕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일단 교동(校洞)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돌아왔다. 이때 왕의 신변을 보호하던 박영교(朴泳敎) 【박영효의 형】 와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살해되었고, 원세개는 국왕을 하도감(下都監)의 중국 병영으로 옮겼으며, 이튿날 【양력 7일】 중국 병영에서 교지(敎旨)를 발표하여 심순택(沈舜澤), 【영의정】 김굉집(金宏集), 【좌의정】 김병시(金炳始) 【우의정】 등으로 이루어진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정권은 다시 사대당에게 넘어가고 독립당 정부는 성립된 지 겨우 이틀 만에 전복되었다.
일본 공사관은 잇따라 중국 군대와 폭민(暴民)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거류민들도 그들에게 살상(殺傷)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다케조에 공사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여, 20일 【양력 7일】 오후에 공사관원과 거류민 【양쪽 합쳐 약 백여 명】 을 이끌고, 우리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인천으로 피난하였으며, 잠시 그곳에 머물면서 일본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영효, 김옥균 등 독립당의 우두머리들은 의탁할 곳이 없어 모두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 난으로 경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중 살상된 사람은 50여 명이며 대위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도 역시 난민(亂民)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신축된 공사관은 중국 군대와 폭민들이 불태웠다. 변란의 보고가 일본에 도달하자, 조야(朝野)에서 모두 중국 군대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에 분노하였으며, 정부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경성에 파견하고, 청나라는 오대징(吳大徵)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