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동방(東方) 침략
서력(西曆) 제16세기 말엽 무렵에 우랄산맥 동쪽의 땅인 시베리아는 몽고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그 장(長)을 시비르 칸(汗)이라고 불렀다. 러시아인 에르마크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우랄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달아나, 코사크족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시비르 칸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에게 그 지역을 바치고, 또한 전에 지은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시아 황제는 이것을 받아들여 에르마크를 시비르 백(伯)에 봉하였다. 이때가 서기 1581년 【일본 오기마치(正親町) 천황 덴쇼(天正) 9년, 조선 선조 14년】 이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최초로 시베리아를 지배하여 통치한 것이며, 또한 아시아 북쪽 땅을 시베리아라고 총괄하여 부르게 된 기원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인들이 동쪽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은 해마다 크게 진전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시베리아 일대의 땅은 척박하여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광산물이 풍부하고 또한 고가(高價)의 모피가 산출되었으므로, 모험을 즐기는 러시아인들 특히 코사크인들은 속속 대오를 이루어 이주해 왔다.
러시아가 1600년대에 점차 흑룡강(黑龍江) 유역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손을 뻗치자, 야크사(雅克薩) 【흑룡강 연안의 알바진 성(城)】 및 닝구타(寧古塔) 【송화강 유역에 있다.】 등에서 러시아와 청나라 양국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기 1689년 【강희(康熙) 28년】 에 양국 사이에서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되어 외흥안령(外興安嶺) 및 아르군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기로 하자 다년간에 걸친 분쟁은 일소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결과 러시아는 완전히 흑룡강 지방을 공략하여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어 물러나 있은 지 160년이 되었다. 이때 무라비요프가 출현하여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되었다. 1847년에 무라비요프는 동부 시베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해군 사관(士官) 네빌스키는 흑룡강 하구를 순항하고는 비로소 가라후토(樺太)가 반도(半島)가 아니라 섬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마미야 린죠(間宮林藏)가 분카(文化) 5년에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의 명에 따라 흑룡강 하구를 탐험하여, 가라후토를 섬이라고 결정한 지 40년 후였다. 무라비요프는 대담하게도 직접 캄차카 반도를 탐험하면서 점차 통치의 발걸음을 내디뎌 흑룡강은 마치 러시아의 영토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흑룡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부 연해주 지방에서 러시아의 침략은 점차 심해졌으므로, 1858년 【청나라 함풍(咸豐) 8년, 조선 철종 9년】 에 청나라는 러시아와 경계조약(境界條約)을 체결하여, 양국은 흑룡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조소리강(鳥蘇里江)부터 동쪽 해안에 이르는 일대의 땅은 한때 양국이 공유하기로 정하였다. 때마침 영국은 아로호 사건 때문에, 또 프랑스는 그 나라 선교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연합하여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여, 서기 1860년에 마침내 그 수도인 북경(北京)을 함락시켰다. 이때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 이그나치프는 세 나라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여 점차 화의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