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韓) 국호(國號) 제정과 당시의 나라 정세
메이지 27년에 일청전쟁의 시작과 함께 청나라에 의존할 생각을 중단한 조선은 일본의 지도에 따라 국정의 혁신에 착수하였다. 우선 종래 사용해 왔던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자국의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였다. 메이지 28년 1월 【이 태왕 31년 12월 17일】 에 국왕에 처음으로 대군주 폐하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종래 중국의 칙사(勅使)를 맞이하기 위해 지었던 경성의 영은문(迎恩門)을 철폐하였다.
메이지 28년 4월에 일·청 양국 간에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되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청나라에 의해 확인되었다. 국왕은 이러한 사실을 인민에게 알리는 조서(詔書)를 발표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기도 하는 등 국가의 외관을 꾸미는 데 급급하였다. 불행히도 국시(國是)는 일정하지 않아 어제의 친일주의(親日主義)는 갑자기 변하여 오늘의 친로주의(親露主義)가 되어, 결국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당시 독립론(獨立論)이 한 시기를 풍미하여, 독립협회의 최초의 제창에 따라 전에 파괴되었던 영은문 터와 가까운 곳에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여, 이번의 독립을 기념하였다. 【이 문은 독립협회의 최초 주창자인 서재필이 계획하였으며, 러시아 기사(技師)인 사바틴이 그를 도와 메이지 29년(개국 505년) 11월 21일에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