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三國의 일어남과 六伽耶
『高句麗』 高句麗 部族이 漢나라의 세력을 (玄菟) 몰아내고 部落國家의 生活을 하다가 生蒙(鄒牟로도 씀)이 일어나 卒本(滿州의 懷仁縣)을 中心으로 새 나라를 마련하였나니 (國紀 2297 西紀前 37) 이 분이 高句麗의 始祖 東明聖王이다.
高句麗 사람은 본래부터 山꼴에서 農牧과 사냥으로 生活을 하며 또 같은 種族의 여러 部族과 (扶餘 沃沮 濊 等) 다른 種族들(漢의 遼東·玄菟-이 玄菟는 興京老城 方面으로 쫒겨가 있던 것임-樂浪 鮮卑 挹樓 等)에게 둘려쌓였으므로 이러한 가운데에서 發展함에는 자연히 鬪爭의 길을 밟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서 高句麗 사람은 제절로 武를 숭상하고 용맹스러운 性格을 갖추게 되어 鴨綠江流域을 中心으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나니, 高句麗는 처음부터 이웃 여러 나라를 倂呑하면서 漢나라(王莽)와 衝突을 거듭하였으며, 도읍은 琉璃王 때에 (第二代) 鴨綠江流域의 要衝인 國內城(滿洲의 通溝附近)으로 옮겼다.
『百濟』 馬韓의 伯濟(廣州)로부터 일어난 것이니 百濟는 始祖 溫祚를 中心으로 南으로 내려온 扶餘系統의 流移 族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國家로서 나타난 것이다.(國紀 2316 西紀前 18) 그러므로 百濟의 治者階級은 대개 扶餘系統을 받은 것으로서 뒷날까지도 百濟에는 有力한 氏族으로서 所謂 八族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國內의 要城은 王子와 宗族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百濟는 처음부터 南으로 馬韓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면서 때로는 西北으로 帶方 地方(黃海道 一帶)을 쳐 차차 領土的으로 發展하였고 도읍은 始祖 때에 잠간 慰禮城(지금 京城 附近)에 정하였다가 다음에 河南 慰禮城(廣州 古邑)으로 옮겼다.
『新羅』辰韓의 斯盧(慶州) 【斯盧와 新羅는 同音異寫임】로부터 일어난 것이니 斯盧의 氏族社會가 發展됨을 따라 六村 【斯盧의 六村 : 閼川楊山村, 突山高墟村, 嘴山珍支村, 茂山大樹村, 金山加利村, 明活山高耶村】 의 우두머리들이 赫居世를 임금으로 받들었다. (國紀 2277 西紀前 57) 이에서 斯盧는 새로운 나라로서 出發케 된 것이다.
新羅는 차차 안으로 여러 制度가 서며 밖으로 이웃 땅을 차지하면서 천천히 發展의 발길을 내디뎠다. 이같이 新羅는 氏族社會를 基礎로 하였으므로 【骨品制】 위ㅅ 階級에 있어서는 血統을 따라 聖骨 眞骨의 差別이 생겨 初期에는 聖骨出身이 王位에 오르게 되었으며 (第二十八代 眞德女王까지) 또 骨品이 같으면 氏가 다르더라도 王位에 오르는 준례가 서게 되어 朴(赫居世系) 昔(第四代 脫解王系) 金(第十三代 味鄒王系)의 세 系統이 서로 넘나들며 王位에 오르게 되었다
『六伽耶』 弁韓에서도 여러 새로운 나라가 일어났나니 六伽耶 【六伽耶 : 駕洛(金官), 大伽耶, 小伽耶, 星山伽耶, 險羅伽耶, 古寧伽耶】가 곧 그것이다. 六伽耶 가운데에도 洛東江 下流域에 首露王이 일어난 駕洛國 【駕洛과 狗耶는 同音異寫임】 과 (國紀 2375 西紀 42) 洛東江 上流域의 大伽耶(高靈)가 세력과 文化에 있어 가장 보암직한 것이니 特히 駕洛國은 狗耶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産業과 交通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