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一編 上古(太古-三國時代)上古의 後期(三國時代)第一章 三國의 勃興과 發展

二. 三國의 發展과 爭覇

(1) 三國의 領土的 發展

(가) 高句麗는 特히 大祖王(第六代) 時代로부터 美川王(第十五代) 時代까지가(國紀 2356-2644 西紀 53-311) 그의 興隆期로서, 西으로는 漢, 魏, 燕과 싸우면서 東北으로 扶餘, 挹婁, 東으로 沃沮, 濊 等을 經略하고, 西쪽의 玄菟(新)와 南쪽의 樂浪을 자조 쳐 美川王 때에 이르러는 마침내 玄茗(新)을 평정하여 遼河의 東편 地域을 차지하였으며 樂浪을 쳐 滅하여 半島로부터 漢族의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帶方방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 百濟는 廣州를 中心으로 점점 發展하더니 古爾王(第八代) 때로부터 近肖古王(第十三代) 時代까지가 (國紀 2567-2708 西紀 234-375) 그의 興隆期로서 안으로는 文物制度가 갖추어지고, 밖으로는 馬韓 諸國을 거의 平定하였으며 西北으로 帶方 一帶에 세력을 펴 高句麗와 다투기에 이르렸다.

(다) 新羅는 西北으로 百濟는 東南으로 領域이 각각 늘어가매 羅 濟兩國 사이에는 일찍부터 衝突을 거듭하였으며, 다시 新羅는 奈勿王(第十七代) 때에 이르러 그의 세력이 北으로 何瑟羅(江陵) 一帶에까지 미치게 되매 (國紀 2730 西紀 397年頃) 高句麗와의 관계도 점점 시끄럽게 되었다.

(2) 麗濟의 攻爭과 羅濟의 同盟

(가) 百濟는 近肖古王 때에 이르러 帶方 땅에 세력을 펴고 平壤城下까지 쳐 들어가 高句麗의 故國原王(第十六代)을 戰死케 한 뒤로 (國紀 2704 西紀 371)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險惡하게 되었다.

(나)『廣開土王의 偉業과 高句麗세력의 南進』 【廣開土王碑】 高句麗의 廣開土王(第十九代)은 東征西伐 南進北討에 一生을 보내어 (國紀 2425-2745 西紀 392-419) 高句麗의 威力을 빛내며 領域을 크게 늘여 廣開土王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나니, 南으로 百濟를 쳐 漢水 以北을 차지하고 다시 新羅의 邊境을 엿보던 日本兵을 쳐 그것을 洛東江 上流域에서 殲滅하였으며, 東으로 향하여 당시 叛服이 無常하던 沃沮와 濊를 거듭 平定하고 北으로 碑麗國을 쳐 松花江 流域을 차지한 위에 東北으로 挹婁의 여러 部族을 (寧古塔 附近으로부터 沿海州에 걸쳤음) 平定하는 等 우리 歷史上에 未曾有의 武勳을 빛내었다.

그 다음 長壽王 때에는 廣開土王의 餘勢로써 세력을 더욱 南으로 내밀어 도읍을 平壤으로 옮기고(國紀 2760 西紀 427) 百濟를 드리쳐 그의 國都를 두려빼며 盖鹵王(第二十一代)을 베혀 百濟로 하야금 도읍을 熊津(公州)으로 옮기게 하였다.(國紀 2808 西紀 475) 【百濟는 그 뒤 聖王 때에 도읍을 다시 泗泚城으로 옮겼음】

그리고 연다라 新羅까지 쳐 南으로 내려온 結果 그의 領域은 竹嶺一帶로부터 南陽灣의 線까지 미치게 되었다. 高句麗의 壓力이 이같이 커지매 羅 濟兩國은 더욱 不安을 느껴 共同防禦를 目的으로 同盟을 맺었나니 이러한 三國間의 國際관계는 그 뒤 約 百餘年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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