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高句麗와 隨·唐의 衝突
『隋寇』 (가) 隨 文帝와 煬帝의 侵略的 野望에 대하여 高句麗는 積極策으로써 遼西 地方으로 進擊하는 蒙古 一帶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突厥과 맺어 隋나라를 牽制하려 하였나니 이에서 두 세력이 마침내 부딪치게 되었다.
(나)『第一次 入寇』 嬰陽王(第二十六代) 九年에 (國紀 2931 西紀 598) 隨 文帝는 水陸 三十萬軍으로써 侵入하다가 中途에서 敗歸하고 말았다.
(다)『第二次 入寇와 蕯水大捷』 隨 煬帝(文帝 子)는 본래 政治的 虛榮心과 豪蕩한 性格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당【隨 煬帝가 大運河를 판 것도 高句麗 遠征 準備의 하나임】시 唯一의 强敵인 高句麗를 쳐 그들의 不安을 없이하는 同時에 그의 征服慾을 채우고 宿怨을 풀려는 決心 아래서 모든 國力을 기우려 遠征의 準備를 하였다.
그리하여 嬰陽王 二十三年에 이르러 隨 煬帝는 드디어 陸軍 百 十三 萬餘名과 江淮 水軍을 動員하여 大擧 侵入하였나니 이것은 未曾有의 大軍事 行動이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편에서는 乙支文德의 總指揮 아래에서 邀擊의 態勢를 가다듬으며 멀리 온 敵을 疲勞케 한 다음에 쳐 부시려는 作戰을 세웠다. 隨軍은 遼河를 건너 遼東 각처의 要城을 攻擊하였으나 우리 軍의 굳세게 지킴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저편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高句麗의 서울 平壤을 치는 것이 勝利의 捷徑이라 하고 于伸文 宇文述 等이 精銳 三十萬 五千으로서 鴨綠江을 건너 平壤을 향하여 쳐 들어온다. 그 때에 乙支文德은 敵을 깊이 끌어들여 그것을 疲困케 한 다음에 一 擊을 加하려는 計劃을 세우고 짐짓 敗하는척 하면서 敵을 平壤 附近까지 끌어들였다. 隨軍은 과연 極度로 疲勞하여 戰意를 잃고 退却치 아니치 못하였나니 이에 各處에서 待機하고 있던 우리 군사는 四方에서 몰아쳐 蕯水(淸川江)까지 이르렀다. 【蕯水大捷】 그리하여 隋軍이 절반쯤 건너가는 것을 기다려 最後의 總攻擊을 한 結果 隨軍은 거의 殲滅되어 살아간 者가 二千 七百人 밖에 되지 못하였다. 隨 煬帝는 一敗塗地로 달아나니 전부터 사나운 政治에 不平을 품고 있던 그의 民衆은 機會에 四方에서 叛亂을 일으켜 隨나라는 마침내 滅亡하고 말았다.
『唐太宗의 入寇』 (가) 高句麗는 隨나라를 거꾸러트린 뒤에 그의 세력이 더욱 떨쳐 새로 일어난 唐나라에 큰 威脅을 주고 있었다. 그 때에 新羅에서는 麗濟 兩國을 牽制하려고 聯唐策을 써 자주 唐나라를 움지겼으며 高句麗에는 莫離支 【莫離支는 「머리치」로 읽을 것으로서 軍政 兩權을 걷어쥔 大臣의 職名임】 인 淵蓋蘇文이 唐나라에 對하여 强硬策을 쓴 結果 麗·唐의 兩大 세력 사이에 衝突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安市城의 勝利와 唐 太宗의 敗歸』 寶藏王(第二十八代) 三代(國紀 2977 西紀 644)에 唐 太宗은 드디어 자기 國家의 脅威를 除去하려 決心하고 水陸 三十萬軍을 스스로 指揮하여 遼東 땅으로 侵入하였다. 이에 對하여 高句麗에서는 淵蓋蘇文의 作戰 아래에서 굳게 守勢를 지켜 敵으로 하여금 疲弊케 하는 戰法을 取하였다. 唐軍은 遼東 各處에서 高句麗의 要城을 攻擊하였으나 용이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犧牲을 내어 겨우 그것을 뺏었다. 그리고 당시 遼東 地方에 있던 高句麗의 主力은 安市城(盖平 東北의 英城子)에 모여 있으므로 이 城을 뺏지 못하면 平壤으로 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에 唐 太宗은 全軍을 몰아 安市城을 치나 우리 軍은 교묘히 막아내었다. 唐軍은 城밖에 土山을 쌓아 그 위에서 城中 【安市城】 을 내려다보고 치려하였으나 그 土山조차 우리 軍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八十八日 동안 安市城을 치던 唐 太宗은 마침내 맥이 풀려 敗軍을 걷어가지고 遼東의 진펄을 간신히 건너 허둥지둥 도망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