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新羅의 麗·濟合倂
『三國의 情勢』 眞興王 以後로 新羅의 세력이 강성함에 高句麗와 百濟는 크게 위협을 받아 서로 맺게 되었다. 孤立 상태에 빠져 있던 新羅는 善德女王(第二十七代) 때에 積極的으로 聯唐策을 쓰며 金春秋는 外交에, 金庾信은 軍政에 힘을 들여 國力을 튼튼히 하고 있었다.
『百濟 平定』 百濟의 武王(第三十代)과 그 다음 義慈王은 享樂과 사치를 極히 하여 人民을 괴롭히고 政治를 어지럽게 한 위에 부질없이 新羅를 자조 侵攻하여 國力을 消耗하였다. 그 때에 新羅에는 聯唐策을 쓰던 金春秋가 王位에 오름에 (第二十九代 太宗武烈王) 唐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親密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武烈王 七年에 (國紀 2393 西紀 660) 新羅는 마침내 唐을 움지겨 聯合軍으로써 百濟를 치기에 成功하였다. 【唐의 百濟에 대한 積極策을 百濟의 與國인 高句麗 征伐의 前提임】
新羅에서는 金庾信이 五萬의 精兵을 거느리고 東北쪽으로 쳐 내려오고, 唐나라에서는 蘇定方이 十三萬軍으로써 바다를 건너 錦江 어구로 들어왔다. 不意의 夾擊을 받게 된 百濟는 매우 낭패하여 階伯은 決死隊 五千으로써 黃山벌에 나아가 金庾信과 싸웠으나 衆寡가 不敵으로 徶亡되고 錦江 어구에서 唐軍을 막던 百濟軍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羅唐軍은 서로 呼應하며 百濟의 서울 泗泚城(扶餘)을 두려빼고 義慈王을 항복시켜 百濟를 滅하였다. (百濟는 三十一代 六百七十八年을 지내었음)
『高句麗 平定』 高句麗에는 國威를 빛내고 있던 淵蓋蘇文이 寶藏王 二十五年에(國紀 2998 西紀 665) 죽으매 그의 一族 사이에 政權을 다루는 內訌이 일어나 그의 長子 男生은 唐나라로 내달아 降伏하고, 그의 아우 淵淨土는 十二城을 가지고 新羅에 붙이었다. 高句麗의 內部가 이같이 무너지매 百濟를 滅한 다음에 高句麗를 엿보던 新羅는 다시 唐나라와 맺아 出兵하기에 이르렀나니, 이는 文武王(第二十代) 七年의 일이다(國紀 3000 西紀 667).
唐나라에 있어서는 高句麗가 그들의 宿敵인지라 唐主 高宗(太宗의 子)은 新羅와 呼應하여 男生을 嚮導로 하고 李勣을 總指揮로 水陸 大軍을 움지겨 高句麗에 侵入하였다. 그 때에 高句麗는 內部가 아수선한 위에 凶年이 거듭 들어 나라의 基礎가 흔들었으나 오히려 二年 동안이나 敵軍과 싸우다가 寶臧王 二十七年(國紀 3001 西紀 668)에 平壤城이 羅唐軍에게 陷落되어 마침내 亡하고 말았다.(高句麗는 二十八代 七百五年을 지내었음)
『半島統一의 完成』 新羅가 唐나라를 끌어 百濟와 高句麗를 滅한 것은 그의 目的이 본래 唐나라의 세력을 利用하여 三國을 統一함에 있었다. 그러나 唐나라는 百濟 高句麗가 거꾸러진 뒤에 그의 중요한 각 地域을 軍事的으로 占據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래 新羅가 容認할바 아니려니와 百濟의 遺民과 高句麗의 遺民이 또한 抗唐의 旗幟를 내세우고 復興運動을 일으켰다.
百濟 사람으로는 王族 福信과 僧 道琛 等이 王子 豐을 세우고 周留城과 任存城 等을 근거로 하여 唐軍을 크게 괴롭혔으며 高句麗 사람으로는 劍牟岑 等이 寶臧王의 外孫 安舜을 세우고 한참동안 唐軍과 抗戰하였다. 이 兩國 遺民의 抗唐 復興運動을 大勢에 끌려 모두 失敗로 돌아갔으나 唐軍에 있어서는 또한 적지 않는 타격이었다.
이때에 新羅에서는 實力으로써 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로 하고, 먼저 百濟 땅에 留屯하고 있는 唐軍을 쳐 내몰고 高句麗의 舊彊은 高句麗 遺民의 協力을 얻어 마침내 大同江 流域까지 回收하였나니, 이로부터 新羅의 北境은 大同江 流域으로부터 元山灣에 이르는 線이었다. 新羅의 이러한 强硬策으로 말미암아 唐나라와의 關係가 한 때에는 매우 險惡하였으나 세력이 차차 弱해 가고 있던 唐나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