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大新羅의 全盛期
太宗武烈王(第二十九代) 時代로부터 惠恭王(第三十六代) 時代까지 約 百 二十年 동안이 大新羅 즉 統一新羅의 全盛期니 이 동안에 民族과 文物制度의 一大 統一이 이루어졌다.
(가)『民族의 統一』오랫동안 갈려 있던 百濟 사람과 高句麗 사람을 新羅 國家라는 큰 우리에 넣어 一大 民族으로 再出發을 하게 되었다.
(나) 制度의 整備『政府』 國政을 總括하는 곳으로 執事省이 있고, 位和府는 官吏의 任免을 맡으며, 禮部는 敎育 禮樂, 兵部는 軍事, 倉部는 租稅, 左·右里方府는 律令, 例作府는 工事를 각각 맡은 機關이다. 이것은 唐나라 制度의 影響을 많이 받은 것으로서 後世의 六部, 또는 六曹의 制度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 밖에 官吏의 糾彈을 맡은 司正府, 外國使節을 接待하는 領客府, 船舶의 일을 맡아보는 船府, 車馬의 일을 맡은 乘府 等 여러 가지 機關이 있었다.
官等으로는 伊伐飡(角干)으로부터 造位에 이르기까지 十七等으로 나뉘었나니 特히 第一等 伊伐飡으로부터 第五等 大阿飡은 眞宗 以外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또 國家에 큰 功勳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最高 爵位로서 太大角干 大角干 等이 있었다.
『軍制』 新羅에서는 軍營을 停이라 하고 部隊는 幢 誓 等으로 나뉘었다. 停은 十六이 있어 서울을 비롯하여 國內 중요한 곳에 두었으며 幢은 그의 數와 種類가 極히 많아 各地에 配置되었고, 또 甲幢 弩幢 長槍幢 雲梯幢 石投幢 等 特科隊도 있었다. 그리고 軍官으로는 將軍(大將軍 上將軍 下將軍) 大官 大監 隊大監 弟監 少監 等 여러 階級으로 나뉘었다.
『地方制度』 各 地方에 州를 두어 다스렸나니 州 아래에 여러 郡이 나뉘어 있고 郡 아래에 여러 縣이 있으며 縣은 여러 村으로 되었고 그 밖에 鄕과 部曲이라는 特殊한 部落이 있었다. 그리고 重要한 곳에는 國都에 다음가는 都會로서 小京이라는 것을 두었다. 이 같은 新羅의 地方制度는 (九州 五京制) 神文王(第二十一代) 때에 갖추어졌으며 다시 景德王(第三十五代) 때에 이르러서는 州 郡 縣의 名稱을 中國式으로 고쳤다.
(다)『佛敎와 儒學』佛敎는 이 時期에 더욱 盛하여 民衆 사이에도 널리 行하였나니 名僧으로는 義湘 元曉 【元曉의 海東䟽】 等이 輩出하고 寺刹로는 四天王寺 奉德寺 佛國寺 石佛寺(石窟庵) 等을 비롯하여 地方에는 通度寺 海印寺 浮石寺 華嚴寺 等이 나타났다.
『儒學』儒學의 세력도 이때에 머리를 들게 되었나니 神文王 때에 國學 즉 大學을 세우고 그곳에 博土를 두어 儒學의 經典과 漢文學을 가르치게 하였고 聖德王(第三十三代) 때에는 唐나라로부터 孔子와 그의 弟子들의 화상을 가져다가 國學에 安置하였다. 그리고 官吏 登庸制에 있어서도 【科擧制의 濫觴】 元聖王 때에 (第三十八代) 讀書出身科를 베푸러 人材를 뽑게 되었다. 이것은 儒學으로써 政敎의 理念을 삼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며 特히 人材 登庸에 있어 讀書出身科를 둔 것은 花郞制로부터 中國式인 科擧制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으로서 文弱의 風도 이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라)『學術·工藝와 名人의 輩出』 學術에는 天文(曆) 醫學 算學 等에 博土라는 專門의 職이 있고 工藝에는 武烈王陵碑 雁鴨池 臨海殿址 掛陵 佛國寺 石佛寺 奉德寺鍾 等 當時의 솜씨를 보여주는 찬란한 遺跡이 많이 남아 있으며, 人物에는 歷史의 金大問과 文學의 强首, 儒學과 文學의 薛聰(元曉의 子), 글씨의 金生, 畵의 率居 等이 輩出하였다.
(마)『吏讀와 歌風』 吏讀(이두)는 漢字의 音과 訓을 빌려 國語를 적는 것으로서 國字를 가지지 못한 옛적에 있어서는 매우 요긴한 것이다. 吏讀는 전부터 씨여졌으나 이 時期에 이르러 널리 行하였으며 노래를 지어 부르는 風習이 예부터 내려와 新羅에서 자못 盛行하였나니 그 때 사람들은 지어 부르는 노래에는 神明을 感動시킬만한 힘조차 있다고 믿어 매우 그것을 숭상하였다.
(바)『서울의 繁榮』 新羅는 統一時代에 들어 旺盛한 國民의 活動과 豐富한 物資에 다시 唐 文化의 影響을 받아 特히 新羅 서울의 文物은 찬연히 빛났으며 上流의 生活은 호화로운 것이었다. 隆盛期의 新羅 서울에는 戶數가 十七萬餘에 區域이 千三百六十坊이며 집은 瓦家뿐이고 밥은 숯으로 지었으며 音樂소리가 四方에 들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