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二編 中古(新羅統一期-高麗)中古의 前期(新羅統一期-新羅末)第一章 民族과 文化의 統一

二. 新羅사람의 海外發展

(가)『唐나라에 對한 活動』 新羅와 唐나라 사이에 政治的 交涉이 매우 圓滑하였으므로 交通(대개 海路를 取하였음) 貿易 其他 文化活動의 各部面에 걸쳐 兩國의 關係는 자못 快調를 보이었다. 우리와 中國과의 貿易에 있어서는 公的 貿易 즉 朝貢의 戒式을 通한 것과 私的 貿易 즉 民間의 것이 있나니, 元來 朝貢은 中國 사람의 政治的 自尊心을 滿足시키는 한 가지 方法인 同時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唯一한 公的 貿易의 手段이었다. 그리하여 羅唐 兩國의 政府 사이에는 多量의 物資가 朝貢이라는 形式으로써 늘 交換되었다.

【惠招의 『往五天竺國傳』】 한편으로 留學生과 求法僧이 新羅統一 以後로 末期에 걸쳐 더욱 많이 唐나라에 건너 갔나니 特히 求法會 가운데에는 惠超라 하는 이가 일찌기 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佛敎의 본 고장인 印度에 들어가 오랫동안 佛法을 닦아가지고 中國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印度旅行記로서 『往五天竺國傳』이라는 貴重한 글월을 남기었다. 【新羅의 求法僧 가운데에는 惠超 以外에 印度에 건너간 사람이 많음】

【新羅方】 그리고 新羅의 中 末頃에 海禁이 자못 풀려 航行이 自由롭게 되매 貿易과 移住를 目的으로 하는 新羅人의 大陸 進出이 자못 活潑하여 楚州(江蘇省) 泗州 漣水鄕(江蘇省)과 같은 곳에는 新羅坊이라는 新羅人의 居留地가 建設되었으며, 登州 文登縣(山東省)에도 新羅人의 세력이 相當히 移植되었다.

(나)『 張保皐의 淸海鎭과 海上勢力』 新羅 末期에 國家의 統制力이 약해지매 海上에는 海賊이 橫行하여 沿岸 地方을 시끄럽게 하였다. 이에 張保皐는 海上 세력을 걷우려고 淸海(莞島)에 鎭 【淸海鎭】 을 베푸러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張保皐는 黃海와 朝鮮 海峽의 海上權을 쥐고 唐과 日本에 貿易船(交關船)과 貿易 使節(逈易使, 遺唐賣物使)을 보내어 大規模의 國際貿易을 하였으며 新羅를 中心으로 中日의 交通은 專혀 淸海鎭의 船舶에 依하여 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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