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高麗의 興起와 後三國의 統一
秦封王 弓裔는 末年에 이르러 마음이 교만해지고 또 佛敎를 惑信하여 정사를 보살피지 아니하매 나라의 基礎가 흔들르기 시작하였으며 또 사람을 의심하고 시기함이 점점 甚하여 部下들은 勿論이요 그의 家族까지 참혹하게 죽이고 있으므로 人心은 매우 소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王健의 革命이 일어났나니 본래 王建은 松岳(聞城)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弓裔를 섬겨 많은 功勳을 세웠으며 甄萱의 海上 세력을 꺾기 위한 光州와 珍島의 經略도 실상은 王建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王建은 이와 같이 많은 功을 세웠으며 度量과 智略이 또한 뛰어났으므로 그의 세력은 점점 굳어지고 人望이 또한 높았다. 그런데 한편에 있어 弓裔의 亂暴함은 날로 심해가며 王健의 部下인 洪儒 裴玄慶 申崇謙 等이 革命을 일으켜 弓裔를 몰아내고 王健을 세웠다. (國紀 3251 西紀 918)
王健은 그의 國號를 高麗라 하고 도움을 松岳으로 옮겨 弓裔의 다스리던 땅을 그대로 차지해 가지고 새로운 세력을 떨기 시작하였나니 이가 곧 高麗 太租다 당시 新羅는 날로 무너지고 있으므로 高麗의 敵은 後百濟이었다. 그러므로 王建은 新羅에 대해서는 自滅하기를 기다리고 後百濟에 대해서는 全力을 기우려 天下를 다투었다.
당시 後百濟 甄萱의 세력은 매우 强盛하여 北으로 王建과 싸우면서 東으로 新羅를 쳐 한때에는 慶州까지 侵入하여 新羅王의 廢立을 行한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王建은 新羅를 어루만져 자기에게 의지하게 하고 後百濟에 대해서는 굳세게 싸우면서 局面 轉換의 機會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後百濟에서는 王位 다툼으로 甄萱의 父子 사이에는 內訌이 일어나 長子 神劍에게 幽廢를 당한 甄萱은 마침내 王建에게로 달아나왔다. 이에 판국은 急히 回轉되어 王健의 세력이 더욱 떨치매 지금까지 命脉만 보존하고 있던 新羅의 敬順王은 自立의 信念조차 잃은 나머지에 千年의 社稷을 들어 王建에게 바치고 말았다(國紀 3268 西紀 935 新羅는 五十 六代 旭百 九十 二年을 지내었음). 王建은 그 이듬해에 神劍을 쳐 後百濟를 평정하고 잠간동안 벌어져 잇던 後三國을 統一하여 三國統一의 前날 狀態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