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二編 中古(新羅統一期-高麗)中古의 後期(高麗朝)第三章 高麗後期의 動亂

一. 內部의 動亂

高麗의 後期는 仁宗(第十七代) 때로부터 滅亡에 이르기까지 約 二百 六十餘年 동안이니 (國紀 3456-3725 西紀 1123-1392) 밖으로는 蒙古의 侵略을 받고 안으로는 權臣 武人의 專橫과 內亂의 頻發로 말미암아 마침내 衰亡케 된 것이다.

(가)『李資謙의 變亂』 睿宗의 다음에 仁宗이 어려서 位에 오르매 外戚 李資謙이 더욱 威勢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李資謙의 一門은 前부터 王室의 外戚으로서 세력을 누리고 왔나니 資謙의 祖 子淵의 長女가 文宗의 妃가 되어 順宗 宣宗 肅宗 等을 낳았으며, 그 뒤 歷代의 王后도 많이 그의 一門에서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李資謙의 第二女가 睿宗의 妃가 되어 仁宗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그의 第三女와 第四女가 또한 前後하여 仁宗의 妃가 되었다.

이에서 外戚 專權의 禍가 일어나게 되었나니 李資謙은 尙書令으로서 政權을 거머쥐고 朝廷을 흔들었다. 王族 重臣을 비롯하여 朝廷 百官 가운데에 자기에게 아첨하고 붙지 아니한 者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써 除去하고 그의 族黨과 部下를 國家의 要職에 配置하였다. 그의 一族들은 사치를 마음껏 하며 弱한 사람의 田土를 强奪하고 奴僕을 놓아 路上에서 人民의 車馬를 掠奪하는 等 暴虐이 심하였다. 그리하여 뇌물은 公公然하게 行하고 政治가 어지러워 人心이 자못 騷然하였다.

資謙의 行動이 갈수록 亂暴하고 참담한 뜻까지 품게 되매 仁宗도 크게 그를 꺼려 秘密히 除去하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目的을 達치 못하고 도리어 李資謙이 군사를 끌고 宮城에 들어와 宮闕를 불태운 다음에 仁宗을 私弟로 옮겨놓고 毒殺까지 하려 하였다. 이윽고 將軍 拓俊京이 王의 密旨를 받고 일어나 兵力으로 써 李資謙과 그의 黨類를 부뜨러 먼 곳으로 귀양보내 버렸다. 이 變亂으로 말미암아 王權은 더욱 떨치지 못하였으며 宮闕도 불에 타 荒凉케 되었다.

(나)『妙淸과 大爲國』 仁宗 때에 僧 妙淸이 西京(平壤)을 根據로 叛亂을 일으켰나니 여기에는 여러 가지 原因이 있는 것이다. 平壤은 본래 政治的 都市로 또는 文化的 都市로 가장 오랜 歷史를 가진 곳으로서 風水地理說에서도 가장 有名한 곳이다. 그러므로 高麗 太祖는 平壤을 가르쳐 『우리나라 地脈의 근본이요. 大業 萬代의 땅이라』하고 西京이라 이름하여 늘 平壤에 巡駐한 以來로 高麗의 歷代 諸王은 그 例를 따라 자주 巡駐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首都인 開城은 李資謙의 變亂으로 말미암아 都城이 荒凉케 되고 人心이 解弛하였으며 綱紀가 또한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對外的으로 보면 어제까지 우리 나라를 『父母의 나라』라고 우러러 보던 女眞族이 金國을 세워 도리어 우리에게 壓力을 加하고 있었고 思想的으로 보면 風水地理說이 盛行하여 크게 人心을 眩惑케 하였다. 그러므로 國論 가운데에는 政治를 새롭게 하여 稱帝 建元 즉 王號를 버리고 皇帝라 일커르며 年號를 쓰자는 意見이 잇고 風水家 사이에는 上京 즉 開城은 地德이 衰하여졌다는 說이 盛行하였다.

이에 平壤 僧 妙淸과 日者(天文 曆數 等을 맡은 벼슬아치) 白壽翰이 近臣인 鄭知常 金安 等과 맺아 자주 『稱帝建元』을 仁宗께 建白하는 한편에 『上京은 이미 地德이 衰하여 宮闕도 불타지고 말았으니 도읍을 地德이 旺盛한 西京에 옮기면 王業이 延長되고 金國은 勿論이요 三十六國이 朝貢하리라』는 말로 仁宗을 움지겨 遷都運動을 하였다. 그리하여 仁宗도 어느 程度까지 이 말에 귀를 기우리매 이에 對하여 儒臣인 金富軾 任元敱 李之氐 等은 妙淸 一派의 說이 荒唐한 것과 國祭 情勢가 不利한 것을 들어 맹렬히 反對運動을 일으켰다.

妙淸 等은 드디어 仁宗 곁에 있는 儒臣들을 거저 두고는 西京遷都가 不可能하다 생각하고 仁宗 十三年(國紀 3468 西紀 1135) 正月에 叛亂을 일으켜 西京을 根據로 國號를 『大爲』라 하고 年號를 『天開』라 하며 그의 軍隊를 『天遣忠義軍』이라 일컬었다. 이에 金富軾 等이 官軍을 이끌고 나아가 西京을 에워 쌓았으나 城兵의 抵抗이 또한 頑强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싸우기 一年만에 官軍은 겨우 西京 즉 平壤城을 빼어 그 亂을 평정하였다.

(다)『鄭伸夫의 亂과 武人政治』 仁宗 때에 變亂이 두 번이나 일어나 國勢가 자못 기우러지고 綱紀가 크게 무너졌더니 다음 毅宗 때에 이르러 마침내 文武의 衝突이 일어났다. 元來 高麗에서는 初期로부터 文武에 差別을 두어 文臣을 우대하고 武臣을 賤視하는 傾向이 있어 武人의 不平을 사아 오던터에 特히 毅宗은 사치와 逸遊를 좋아하여 寵臣과 文人으로 더부러 吟咏을 일삼으매 國政은 더욱 荒廢하였다.

당시 毅宗의 寵愛를 받고 잇던 文臣輩는 甚히 武人을 蔑視하고 갖인 侮辱을 加하였으며 그 위에 文臣들은 毅宗과 같이 勝地와 名利로 불러 다니며 詩를 읊조리고 술 마시기로 써 날을 보내었으나 그들을 護衛하고 다니던 武臣들은 飢寒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그리고 一般土卒의 生活은 極度로 군색하여 糊口를 못할 형편이었다. 이에 激憤한 武人 가운데에 將軍 鄭仲夫 李義方 等이 毅宗의 普賢院에 遊幸함을 機會로 兵卒을 이끌고 엄습하여 王의 寵臣과 文臣을 모조리 무찌르고 都城에 사는 文人들까지 一網打盡을 시킨 위에 毅宗을 巨濟島로 내쳤나니 (그 뒤 毅宗은 將軍 李義旼에게 慶州에서 被弑되었음) 이는 毅宗 二十四年의(國紀 3503 西紀 1170) 일이다.

鄭仲夫 等은 毅宗의 아우 明宗을 세우고 政權을 거머쥐었나니 이로부터 武人의 武斷政治가 시작되었다. 이 亂은 그 原因이 다만 毅宗의 失政과 당시 文臣들의 失態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高麗의 國初로부터 흘러 나려온 文武 差別의 一大 反動으로서 顯宗 때에도 武人들이 團結하여 朝廷에 抗拒한 일이 있었다.

이에 政府 武人의 獨舞台가 되어 重房 【重房은 高級 將官의 會議所로서 前부터 있었음】 을 中心으로 武斷政治가 行하였다. 그러나 鄭仲夫 一派의 橫暴은 날로 甚하며 各地에서는 人民의 動亂이 뒤를 이어 일어났다. 이에 같은 武士 가운데에서 慶大升이 憤慨하여 明宗 九年에 鄭仲夫 一黨을 무찔러 얼마동안 禍難을 막더니 慶大升이 죽으매 鄭仲夫의 黨類인 李義旼이 또 들어와 要位를 차지하여 그의 暴虐함이 鄭仲夫에게 내리지 아니하였다. 明宗 二十六年에 이르러 將軍 崔忠獻이 마침내 李義旼을 죽이고 政權을 걷어쥐니 이로부터 崔氏 一門의 專擅時代가 열리었다.

鄭仲夫 以後로 政權 爭奪이 武人과 武人 사이에 되풀이 되다가 崔忠獻에 이르러 비로소 武人政治의 基礎가 安定케 되었다. 崔忠獻은 武人이나 자못 智略이 있어 法을 밝혀 위엄을 세우며 朝廷의 舊臣과 宿將을 차례로 몰아내고 그의 黨類로써 채우며 鄭仲夫 以來로 구석참을 대고 있던 文人들을 차차 閑職에 登庸하여人心을 거두었다.

【都房】 그리고 崔忠獻은 都房이라는 것을 두어 私兵을 養成하여 自己를 替番 護衛케 하였나니 당시 崔氏의 私兵은 잔약한 官軍에 比할 바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崔忠獻은 實力을 背景으로 하여 國家의 大權을 手中에 넣으매 王室은 더욱 衰徹하여 國王의 廢立도 忠獻의 마음대로 行하였다. (崔忠獻은 그의 一生에 四王을 세우고 二王을 廢斥하였음) 그리고 政治에 있어서는 武斷이 많고 賄賂와 賣官이 公然히 行하여 人民에게 끼친 그의 害毒이 자못 컸었다.

그의 勢力과 地位는 다시 瑀(忠獻의 子니 뒤에 이름을 怡로 고쳤음) 沆(孫) 竩(曾孫) 等에게 世襲的으로 傳授되어 國政을 擅斷하였다. 特히 崔瑀가 執政할 때에 蒙古의 侵寇가 시작되었으므로 崔瑀는 도읍을 江華로 옮기고 굳세게 抗戰하여 竩에 이르기까지 三十餘年 동안 繼續하였다.

高宗(第二十二代) 四十五年에 崔竩는 마침내 柳璥·金俊·林衍 等에게 被殺되어 崔氏 一門의 六十餘年(國紀 3529-3591 西紀 1196-1258)에 걸친 武斷政治는 이로써 끝을 맺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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