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二編 中古(新羅統一期-高麗)中古의 後期(高麗朝)第四章 高麗의 衰頹

二. 紅頭賊과 倭寇

(가)『紅頭賊』이웃 元나라의 動亂의 餘波는 高麗에까지 넘쳐들게 되었다. 北部 中國에 橫行하던 紅頭賊은 元軍에게 몰려 恭愍王 八年 頃에 數萬 名이 떼를 지어 高麗로 넘어와 義 靜 麟 等州를 攻略하고 다시 平壤을 攻陷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安祐 李芳實 等의 攻擊에 견디지 못하고 未久에 遁去하고 말았다. 그 뒤 同王 十年에 이르러 十餘萬의 紅頭賊이 鴨綠江의 結氷을 타 大擧 入寇하였다. 安祐 鄭世雲이 安州와 岳嶺(慈悲嶺) 等地에서 邀擊하다가 失敗하매 賊은 松京을 향하여 쳐 나왔다. 王은 福州(安東)로 가 難을 避하고 都城은 마침내 賊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나니 그 때에 賊은 數朔 동안 開城을 根據로 殘虐과 掠奪을 恣行하였다. 우리 側에서는 鄭世雲 安祐 李芳實 等이 賊을 쳐 크게 破하여 都城을 回復하였으나 宮闕과 閭閻이 兵火에 걸려 매우 蕭然한 光景을 이루었다.

(나)『倭寇』 日本의 文物은 古代로부터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갔거니와 日本 사람이 大陸 文物을 가져 가는 데에는 대개 두 가지 方法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니 하나는 外交手段 또는 貿易手段에 依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凉奪手段에 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掠奪 行動을 하는 日本의 海賊을 倭寇라고 부르는 것이다.

倭寇는 元來 三國 時代부터 나타난 것으로서 新羅의 邊境을 항시 침노하던 것도 실상은 倭寇였다. 高麗朝에 내려와서는 高宗 十年(國紀 3556 西紀 1223) 頃부터 倭寇의 患이 차차 늘어가다가 麗蒙 聯合軍이 日本 征伐을 行한 다음에 日本의 大陸 交通이 全然히 封鎖되었으므로 이로부터 倭寇의 跳梁이 더욱더욱 심하게 되었다. 特히 恭愍王 때로부터 禑王(第三十二代) 때에 걸쳐 一層 그의 暴害를 입었나니 대개 倭寇는 近海에 出沒하다가 防備가 踈漏한 틈을 엿보아 不意에 上陸하여 掠奪을 敢行하므로 그를 防禦함에는 여간 困難치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慶尙 全羅 忠淸 京畿의 沿岸 地方은 勿論이요, 江華 喬桐 昇天府와 같은 松京의 가까운 地方까지 자조 侵害를 입었던 것이니 그들은 지내는 곳마다 財貨 穀物을 쓸어갈 뿐만 아니라 婦女子와 小兒을 屠戮하는 殘忍한 짓을 敢行하였으므로 沿岸 一帶에는 人烟이 끊어져 荒凉하게 되었었다.

이에 對하여 崔瑩 李成桂 等이 勇戰奮鬪로 많은 戰鬪를 거듭하여 그것을 차차 制壓해 오더니 禑王 六年(國紀 3714 西紀 1381)에 楊廣(京繼) 全羅 慶尙 三道 都巡察使 李成桂가 당시 咸陽 雲峰 等地에 本據를 둔 倭寇의 大部隊를 荒山(雲蜂) 西北편에서 殲滅하였으며 【倭寇 擊破에 火砲를 썼음】 同王 九年에 鄭地가 戰船 四十七隻을 引率하고 倭寇의 主力 船團(百二十隻)을 觀音浦(南海)에서 捕捉하여 火砲를 써 크게 擊滅한 뒤로는 倭寇의 勢力이 沈衰하게 되었다. 그러나 高麗에서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水軍을 擴張해 가지고 倭寇의 巢窟을 엎어버리자는 意見이 일어나 昌王(第三十三代) 元年에 (國紀 3722 西紀 1389) 朴葳가 百餘隻의 兵船을 이끌고 對馬島까지 進攻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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