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威化島의 回軍과 高麗朝의 轉覆
大軍을 끌고 遼東으로 건너가던 李成桂는 저윽히 決心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짐짓 中路에서 王께 向하여 回軍하기를 請해 보기도 하면서 五月에 鴨綠江上의 威化島에 이르렀다. 【威化島의 回軍】 그는 다시 前進하지 아니하고 曹敏修를 꼬이며 한편으로는 出兵의 不可한 것과 『임금 곁에 있는 姦臣을 除去하여 生靈을 편안케 하겠다』는 口實로 써 여러 장수를 달래어 마음대로 군사를 끌고 돌아섰다.
당시 빈손으로 平壤에 머무르고 있던 禑王과 崔瑩은 크게 狼狽하여 서울(開城)로 돌아오매 李成桂는 大軍으로 써 뒤를 쫓아 들어와 崔瑩을 부뜰어 高峯(高陽)에 流配시키고(뒤에 죽여 버렸음) 禑王을 江華島로 放逐한 다음에 昌王을 (禑王의 아들이니 그 때에 나이 겨우 九歲이었음) 세우니 天下는 이미 李氏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에 前王(禑王)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李成桂의 暗殺을 꾀하다가 發覺되어 도리어 昌王까지 放逐을 당하였다(前王 父子는 모두 配所에서 被殺되었음). 李成桂는 다시 王族 가운데에서 定昌君 瑤를 세웠으니 이가 곧 恭讓王이다(國紀 3722 西紀 1389).
그리하여 當時 國王은 이름 뿐이요 李成桂를 中心으로 그의 羽翼인 鄭道傳 趙浚 南闇 尹紹宗 等이 政權을 잡아 안으로는 勢力을 더욱 굳게 하고 밖으로는 親和政策으로서 對明 關係의 圓滑을 도모하면서 時期가 익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恭讓王 四年에(國紀 3725 西紀 1392) 이르러 【鄭夢周의 被殺】 李成桂派는 드디어 王室을 떠바치고 있던 鄭夢周를 죽인 다음에 王을 廢하여 原州로 내치고 推戴의 形式으로 李成桂가 位에 오르니 이 이가 곧 李 太祖다(高麗는 三十四代에 四百 七十 五年을 지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