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大陸關係와 崔 李의 對立
對外關係에 있어 特히 元 明과의 關係는 자못 微妙하였다. 恭愍王 때에 元나라에는 各地에서 郡雄이 亂을 일으켰다. 그 中에서 朱元璋의 勢力이 점점 强盛하여 恭愍王 十七年에 金陵(南京)에서 帝位에 올라 明나라를 세웠으며 다시 北으로 올라와 元나라의 서울(北京)을 攻略하여 蒙古族을 蒙古 地方으로 쫓아내었다. 그 때에 元의 順帝는 上都(開平)로 쫓겨 갔다가 다시 應昌(內蒙古 達里洎 附近)으로 옮겨나니 이를 北元이라 부르는 것이다.
大陸의 形勢가 이같이 變하여 이에 對하여 당시 高麗 朝廷에는 親元論과 親明論을 主張하는 두 派가 나타나게 되었다. 親元論은 北元과 맺아 새로 일어난 明나라를 牽制하자는 것이며 親明論은 『以小逆大』가 國家에 이롭지 못하니 明나라와 和親하자는 것이었다. 崔瑩은 元來 大陸에 出征하여 그들의 형편을 잘 아는지라 처음부터 親元策을 주장하더니 마침 明나라에서는 遼東 管內에 鐵嶺衛를 두어 鐵嶺 以北의 鴨綠江 流域까지 넘겨다 보려하였다. 崔瑩은 이 위에 더 참을 수 없다 하여 『明나라의 要求가 이러할진대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이 옳다.』하고 드디어 衆論을 排除하고 禑王을 움지겨 同王 十四年(國紀 3711 西紀 1383) 四月에 明나라 征伐을 斷行하기에 이르렀다.
【崔瑩의 遼東征伐】 그 때에 崔瑩은 스스로 八道都統使가 되어 王과 갗이 平壤에 出陣하고 李成桂를 右軍都統使, 曹敏修를 左軍都統使로 하여 約 五萬軍으로 써 (十萬이라 號하였음) 鴨綠江을 건너 遼東으로 쳐 나가게 하였다.
당시 征明 問題에 對하여 李成桂 一派는 姑息策으로 써 所謂 『以小逆大』의 不可함을 들어 反對하였으나 崔瑩은 王의 信任 아래에서 異論을 억누르고 遼東 進擊을 斷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