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

近世의 前期(國紀 3725~3900 太祖~明宗末)

여기에 이른바 前期는 즉 李氏 太祖의 開國으로부터 第十三代 明宗 末까지의 約 一百 七十 六年間을 가리킨 것이니 이것을 또 細分한다면 國初로부터 第九代 成宗 末까지를 前一期, 第十代 燕山君으로부터 明宗 末까지를 後一期로 나누어볼 수 있다.

【前一期】 前一期에 있어서는 대개 治者 階級에 偉大한 抱負를 가진 이가 續出하여 ─ 모든 過渡期的 現象에서 ─ 政治·經濟의 改善, 文化의 向上에 온 힘을 기우리어 文物 制度의 찬란(燦爛)한 꽃밭을 이루게 되었고 儒敎로써 治國의 原理를 삼았던 만큼 이를 偏重한 느낌은 있었으나 그러나 그 儒敎는 空理空談的인 理學(道學)이 아니고 利用厚生의 實學이었으며 佛敎에 對하여는 國初로부터 多少 制限을 加하여왔으나 世宗·世祖와 같은 好佛의 主가 있어 도리어 이를 保護하였다. 또 밖으로 胡人(女眞) 倭人을 制壓하여 特히 胡人에게는 不絶한 積極策을 써서 그들을 豆滿 鴨綠(上中流) 兩江 外로 물리쳐 江內의 땅을 確保하였다. 그리하여 半島國家로서의 가장 隆盛期를 이루는 同時에 近世朝鮮의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後一期】그런데 後一期에는 前日로부터의 오랜 太平 속에 나쁜 慣性이 생기기 시작하여 혹은 호사방종(豪奢放縱)의 主(燕山君)가 나서 政治를 어지러이 하고 모든 方面에 弊害를 끼쳐주었으며 혹은 朝臣 사이에 理論·感情의 對立, 政權의 다툼으로 여러 번 참혹한 禍(士禍)을 되푸리하여 黨派 大分裂의 조짐이 이미 싹텄었다. 그러한 가운데 政治는 姑息的이요 消極的임을 免치 못하였고 學界는 理學(道學) 一便으로, 佛敎는 점점 壓迫의 一路를 밟게 되었다. 또 밖으로 北胡南倭의 跳梁에 對하여도 아무런 確乎한 對策과 防備를 시설치 못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後日 倭亂 胡亂에 있어 朝鮮이 土崩瓦解의 쓰라린 經驗을 맞보게 된 까닭이었다. 이와 같이 前後 二小期에는 각각 다른 點이 많이 있으나, 그러나 全般을 通하여 보면 안으로나 밖으로나 아직 全體的인 큰 變動과 큰 刺戟을 본 일이 없이 國內의 太平이 계속되었던 것은 事實이다. 이것이 第二編에 述할 中期의 歷史와는 多少 다른 點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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