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前期(國紀 3725~3900 太祖~明宗末)

第三章 士禍와 思相界의 動向

【御用學派, 士林派, 節義派, 淸談派】 國初 以來 歷代의 임금이 文治에 힘을 쓰고 儒學을 장려한 까닭에 儒者와 文人들이 무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世祖 成宗 時에 그들 가운데는 實學을 主로 한 御用學者派와 文章 經學을 主로 한 士林派(金宗直 等)와 節義를 主로 한 節義派(金時習 等)와 詩와 술로 벗하여 세상을 흘겨보는 淸談派(南孝溫 等)가 있었다. 이 네 派 가운데 가장 反目이 甚한 것은 御用學者派와 士林派니, 御用學者派에는 대개 서울을 中心으로 한 世族이 많이 있고, 士林派에는 대개 嶺南의 儒者 金宗直을 中心으로 하여 文人들이 많이 모였다. 이 士林派가 서울에 와서 벼슬하기는 成宗 때로부터이었는데 그 派의 中心 人物인 金宗直은 成宗의 비상한 사랑을 받아 그 門人들까지도 벼슬자리에 많이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士林派중에는 날카로운 新進이 많아 매양 御用學者派를 깨끗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이와 반대로 御用學者派에서는 그들을 輕薄한 무리라 하여 귀엽게 보지 않는 傾向이 있었다.

士林派의 史官으로서 (즉 金宗直 門人의 金馹孫 등) 世祖의 不義한 짓과 御用學者派 中의 아름답지 못한 행실을 國史에 올린 일이 있었다. 【戊午史禍】 十代 燕山君 때에 이르러 이것이 발각되자 御用學者派중에 가장 士林派의 미움을 받은 李克暾·柳子光 等은 이를 좋은 機會로 여겨 본래 文人을 싫어하는 燕山君을 激憤시켜 金馹孫 等 士林派의 거의 전부를 罪人으로 몰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을 보냈다. 이 事件이 있기 전에 이미 죽은 金宗直 같은 이는 그 무덤을 파고 시체를 목 베는 등 泉壤의 禍를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戊午의 史禍라 하는 것이니 戊午는 곧 燕山郡 四年에 당한다. 史筆로 말미암은 士林의 禍인 까닭에 史家는 이를 특히 史禍라 이른다.

【甲子士禍】 燕山君 十年(甲子)에도 큰 士禍가 있었으니 그 원인은 燕山君의 어머니인 尹氏가 燕山의 어릴 때에 투기를 하다가 宮을 쫓겨나 억울히 죽은 것을 이때 알고 그 일에 關係한 사람은 물론이요 앞서 史禍에 關係된 사람까지도 함께 몰아 죽이니 이를 甲子士禍라 한다.

【燕山君의 失政】 燕山君은 원래 방탕하여 學問을 싫어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自己의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하려 하여 심지어 成均館(今 經學院)을 宴樂의 장소로 또는 藏義寺(洗劍亭 北)와 大圓覺寺(탑골公園)를 妓樂의 所로 하는 등 실로 大膽한 짓을 하였다.

【中宗反正】 이렇게 모든 政治를 어지러이 하다가 그는 필경 신하들에게 쫓겨나고 대신 그 아우가 들어서서 임금이 되니 이는 곧 中宗이었다. 中宗은 燕山의 나쁜 政治를 바로잡는 한편 趙光祖와 같은 젊은 儒者들을 들어 썼다. 【趙光祖 等의 理想政治】 趙光祖 등은 처음에는 中宗의 사랑을 받아 自己네의 마음먹은 순연한 儒者의 政治를 實現코저 할 새 從來의 制度와 法俗 中에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차례로 改革하려 하였다. 그들의 變法主義的 理論과 施設에는 자못 볼만한 點도 있었다. 特히 良風·美俗을 기르기 爲하여 迷信 打破와 鄕約(勸善·懲惡과 相互 扶助의 精神을 主로 한 鄕村의 規約) 實施를 주장하고 혹은 民衆의 精神生活과 物質生活에 有益한 여러 가지 書籍을 번역하고 印刷하여 널리 펴치는 등-종종의 社會 敎化 運動과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더러 現實을 無視하는 일도 있고 그 手段이 너무 과격하고 急進的인 것도 있었으며 또 自己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다른 文臣을 小人이라 指目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軋轢(알록)과 反目이 일어났었다. 이것이 장차 그들의 致命傷을 받게 될 장본(張本)이었다. 【己卯士禍】 中宗 十四年(己卯)에 趙光祖 一派는 마침내 反對派인 南袞(곤) 沈貞 등에게 몰리어 억울한 주검과 竄黜(찬출)을 당하고 말았다. 史家는 이를 己卯士禍라 이르고 그 士禍에 걸린 一派를 己卯名賢이라한다.

中宗의 뒤는 仁宗이 이어서고 仁宗의 뒤는 그 異母弟인 明宗이 이어 섰다. 明宗의 나이 어리므로 그 生母인 文定王后 尹氏가 後見政治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王의 死戚들 사이에 反目과 暗鬪가 생기었다. 즉 明宗의 外叔인 尹元衡과 仁宗의 外叔인 尹任과의 싸움이었다. 즉 前者를 小尹, 後者를 大尹이라 指稱하거니와 小尹을 中心으로 한 一派는 權勢를 빌어 大尹을 비롯하여 自己네의 미워하는 士類를 罪로 몰아 역시 참혹한 禍에 빠뜨렸다. 【乙巳士禍】 이때는 明宗 卽位初인 乙巳이므로 史家는 또한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士禍後 思想界의 動向】 위의 여러 차례 士禍로 因하여 特히 己卯士禍 以後로 士類들의 기운이 매우 저상되어 그들은 政界를 등지고 出林(田園)을 唯一한 樂園으로 삼아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는 ─말하자면 政治와 學問을 둘로 나누는 경향이 생기었고, 또 先儒의 舊基에 書院이란 것을 세워 그들의 講學과 集會所로 삼는 風習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學問의 경향도 思索과 理論에 기울어져 高尙한 哲理 硏究(性理 硏究)를 主眼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方面의 大家가 많이 일어났으니 徐敬德(花潭) 李彦廸(晦齋) 李滉(退溪) 曹植(南冥) 金麟厚(河西) 奇大升(高峯) 李珥(栗谷)와 같은 名儒들이 즉 그였다. 【李滉과 李珥】 이 중에도 李滉과 李珥는 그 學問과 人格으로 보아 東方에 典型的 儒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개는 편벽되어 朱子學을 鐵則으로 삼아 이와 反對되는 다른 學問에 對하여는 寬容性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半島의 學界를 朱子學으로 單一化하여 多彩 多樣할 빛을 發치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遺憾된 點이었다.

【佛敎界】 이때 佛敎界는 어떠하냐하면 앞서 成宗·燕山·中宗의 歷朝를 通하여 排斥과 壓迫에 退縮되어 人間 社會와 격리(隔離)된 느낌이 있었으나, 寺院은 원래 祈禱와 信仰의 大本山인만큼 宮廷 및 民中 特히 婦女子들과의 사이에 항상 關係를 가지고 있었다. 明宗의 母后 文定王后가 攝政하였을 때에 佛敎를 숭상하여 普雨라는 僧侶를 優待하매 佛敎界는 俄然 活氣를 띠어 擴張의 形勢를 보이었다. 즉 奉恩寺(廣州)를 禪宗 奉先寺(楊州)를 敎宗으로하고 僧科의 試驗制를 다시 設하고 八道의 절을 일시 혁신하였다. 그러나 이때 儒臣과 太學生들 사이에는 佛敎反對 普雨排斥의 맹렬한 運動이 일어나 文定王后의 下世와 同時에 普雨는 濟州로 귀양가 죽고 僧科도 페지의 運을 당하여 佛敎는 다시 일어날듯 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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