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東西의 分黨
【儒者의 세 傾向】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四大士禍가 연달아 일어나는 동안에 儒者들의 動向은 대개 山林을 本居로 하여 官場(政界)에 出入하는 것을 대단 삼갔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소위 政治的 動物인 까닭에 豪華스러운 欲望을 永히 抑制치 못하고 나아가 活躍하기를 조아하는 파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 儒者들 가운데는 대개 세 가지 傾向이 있었다. (1) 하나는 벼슬을 全然 斷念하고 山林에 들어앉아 오로지 學問과 행실을 닦는 派 (2) 또 하나는 가끔 나아가 벼슬은 하되 本心은 山林에 있어 形便을 보아 자주 물러와 學行에 힘쓰는 派 (3) 하나는 이름은 山林에 두고 뜻은 政界에 있어 기틀을 보아 나아가 벼슬 자리를 노리는 派이었다. 成運(大谷) 徐敬德(花潭) 및 曹植(南冥)과 같은 이는 第一에 속하고, 李滉(退溪) 金麟厚(河西) 奇大升(高峯) 李珥(栗谷)와 같은 이는 第二의 경우에 속하나 공부와 지조가 이들만 못한 儒者들은 대개 第三의 境遇에 속하였다.
이 第三類에 속한 儒者들은 원래 벼슬 야심이 있으므로 이들 사이에는 暗暗裏에 자리다툼 權力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또 利害關係 혹은 정의(情誼) 關係로 한편을 두호하고 다른 편을 미워하는 일이 생기었다. 儒者들의 이 습성(習性)이 점점 커져서 分黨의 염려가 있게 되매 宣祖 初의 元老인 李浚慶 같은 이는 이를 매우 걱정하였던 것이다. 과연 宣祖 八年에 이르러 東西의 分黨이 일어나니 沈義謙을 두호하는 一派는 西人이라 指目하고 金孝元을 두호하는 一派는 東人이라 指目하였다. 그것은 沈의 집이 서울 西편에 있고 金의 집이 東편에 있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黨派가 東西로 나뉘어 東人은 西人을 공격하고 西人은 東人을 헐어 말하여 싸움이 벌어지매 李聞(栗谷)와 같은 이는 이를 크게 염려하여 각각 두 派를 달래어 나라일에 同心協力하도록 무한 애를 써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고, 싸움은 그대로 격렬해져 후에는 黨에서 黨이 나뉘고 派에서 派가 갈리었다. 즉 東人 中에서 南人 北人이 생기고 北人 中에서 또 大北 小北 其他 여러 細派가 생기었다. 이 黨爭의 風이 자꾸 계속되어 여러 백 년 동안 우리의 政治를 그르치고 우리의 맘자리와 風俗을 나쁘게 하여 왔지만 이런 버릇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라도 고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