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後期(國紀 4058年-4243年 英祖元年-純宗末)第七章 壬午軍亂과 甲申政變

三. 天津條約과 露國勢力의 發動

【漢城條約을 맺음】 이 政變이 있은 다음달에 日本은 公使舘襲擊 居留民虐殺의 責任을 묻기 爲하여 全權大使 井上馨으로 하여금 步兵 二大隊를 거느리고 京城에 들어오게 하니 政府는 크게 낭패하여 乙酉(陽) 一月 九日에 漢城條約을 맺고 겨우 解決이 되었으니 日淸 兩國兵은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天津條約】 그 해 四月에 日本政府는 伊藤博文을 全權大使로 삼아 天津에 보내어 李鴻章과 담판케 하고 드디어 四個月 안으로 日淸 兩國은 朝鮮에서 撤兵할 것과 將來 朝鮮에 軍隊를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두 나라가 서로 미리 알릴 것이라는 等을 約定하였다. 이 條約에 依하여 얼마 뒤에 兩國兵은 물러갔으나 袁世凱는 通商事務 全權委員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袁世凱의 干涉이 날로 甚하여지매 事大黨도 차츰 이를 싫어하는 경향이 생기었다.

【韓露通商條約】 前年에 露西亞는 韋貝라는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外交顧問 穆麟德의 알선으로 韓露通商條約을 맺고 (甲申) 韋貝는 이내 公使로 머무르게 되었다. 또 그는 朝鮮과 陸路通商條約을 맺고 朝鮮兩國人의 國境貿易의 自由와 또 露人을 爲하여 富寧을 開放할 것을 規定하였다. 그는 매우 재간이 있어 宮中으로 자주 出入하여 王의 사랑을 받고 朝廷에는 차츰 親露의 一派가 생기게 되니 日本과 淸國의 들어오는 힘을 막는데는 露國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英艦 巨文島 占領】 이때 露國과 매우 사이가 좋지 못한 英國은 露國의 勢力이 朝鮮에서 날로 커감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高宗 二十二年 乙酉(國紀 4218 西紀 1885)에 이르러 英國은 東洋艦隊를 보내어 全羅道의 巨文島를 占領하고 砲臺를 쌓으며 兵營을 세우는지라, 露國도 不安을 품고 朝鮮政府에 抗議를 提出하였다. 李鴻章이 중간에 들어 露國은 朝鮮 땅을 侵略하지 안는다는 保證을 세운 뒤 英國은 二十四年 丁亥에 비로소 巨文島을 내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을 두고 淸露 露英 日露 日淸의 暗鬪가 날로 심하여감을 따라 차츰 조선은 그들의 씨름터가 되어졌다.

【新文化採用】 이러는 동안 새 文化의 물결은 밀려 들어 高宗 二十一年 甲申에는 午正에 大砲를 놓아 時間을 알리고 濟衆院을 세워 新式 治療法을 베풀고 育英公院을 세워 英語를 中心으로한 洋學을 가르치고 其他 機械局(兵器廠)·典圓局(貨幣製造局)을 두어 新式兵器 新式貨幣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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