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後期(國紀 4058年-4243年 英祖元年-純宗末)第八章 東學亂과 淸日戰爭

一. 東學敎門의 運動과 東學亂

앞서 崔濟愚(水雲)의 이르킨 東學敎는 虐政에 시달리는 백성의 共鳴을 얻어 崔의 死後에도 자꾸 퍼져 마침내 큰 敎圈을 이루게 되었다. 【第二世敎主崔寺亨】 즉 이때까지 숨어가며 힘을 모아오던 그들은 第二世敎主 崔時亨(海月)을 中心으로 하여 그 運動을 차츰 表面에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表面化 運動이 시작되자 敎勢는 三南(慶尙·全羅·忠淸)을 위시하여 江原 黃海 平安道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敎視伸寃運動】 이리하여 高宗 二十九年 壬辰에 海月 崔時亨은 忠北 報恩을 中心地로 하여 各處의 敎徒를 모아놓고 敎主 崔濟愚의 寃을 풀자는 의논을 決한 後 긴 上書文을 政府에 올리었다. 翌年(癸巳)에도 敎徒 朴光浩 等의 主唱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이르러 歎願하는 上疏를 올리었으나 헛되이 退却당하였다.

官吏 土豪의 행패가 말할수 없을 지경이라 참고 참던 民衆은 이 東學敎門運動에 자극되고 또 그들의 부채질에 불이 붙어 高宗 二十七年부터는 民擾가 各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守令을 내쫒고 官衙를 불지르며 納稅를 拒否하였다. 敎主 伸寃運動에 失敗하고 報恩으로 돌아온 東學敎徒는 그 수가 날로 불고 그 形勢가 장차 不穩할 지경에 이르매 朝廷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魚允中을 宣撫使로 보내어 그 敎徒를 타일러 헤쳐보내게 하였다. 敎徒들은 宣無使의 說諭로 말미암아 한때 解散하였으나 그들의 不平은 식을 날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떠한 기틀로 그들의 團體行動이 일어날지 모르는 形便이었으며 또 이때 一般民心도 地方官의 搾取로 말미암아 極度 動徭되어 마치 불덩이를 안은 것 같은 形便이었다.

【趙秉甲의 私慾】 이때 마침 全羅道 古阜郡守로 있던 趙秉甲이 高宗 三十一年(甲午)에 萬石洑라는 「물보」를 修理하매 數萬의 人夫를 부리고 그 보ㅅ물을 받는 사람에게서 水稅를 받아 혼자 제배만 채우니 이에 백성들은 분로하여 마침내 들구 일어낫었다.

【全琫準擧兵】 그 무리 중에는 東學敎徒가 많아 全琫準이라는 이를 괴수로 삼아 敎徒와 郡民이 합하여 古阜의 軍器庫를 占領하고 亂을 일으키니 郡守 趙秉甲은 이미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東學亂의 시초이었다. 이 消息을 들은 全羅監司는 軍隊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古阜 白山 싸움에서 크게 지고 그의 領兵官 李庚鎬는 戰死하였다. 【全州陷落】 이에 政府에서는 洪啓薰을 招討使로 하여 官軍을 이끌고 치게 하였으나 첫 싸움에 또한 利롭지 못하니 이에 기세를 올린 東學軍은 井邑 泰仁 金溝를 거쳐 四月 廿七日에는 全州를 陷落시키고 말았다.

이 全州 占領 當時는 東學軍의 가장 떨친 때니 全羅道는 거의 그들 손에 들어가고 京畿 忠淸 慶尙諸道의 敎徒들도 서로 應하여 官長을 죽이고 혹은 내어쫓으며 倉庫를 약탈(掠奪)하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招討使 洪啓薰은 全琫準의 뒤를 쫓아 全州 城外에 다달아 맹렬한 砲擊을 시작하여 東學軍의 士氣를 차차 저상케 한 후 歸順 解散하라는 宣諭를 내리었다. 全琫準測으로 보면 官軍만에 對한 抗戰이라면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마는 淸兵의 來援이 있다함을 알고 士氣를 일키 시작하여 드디어 招討使의 宣諭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退却하겠다는 뜻을 전한 후 全州府를 撤退하였다.

【全琫準再擧】 그러나 全捧準은 그 무리를 解散치 않고 再擧의 機會를 엿보다가 그 해(甲午) 六月에 全州다시 일어나 公州등지를 범하니 官軍이 또 나려와 여러 곳에서 激戰을 거듭한 끝에 琫準을 잡아 서울로 보내 이듬해 死刑에 處하니 그 도무리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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