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甲午更張(경장)
【開化黨組閣】 淸日戰爭이 터지자 形勢 利롭지 못함을 안 袁世凱는 가만이 歸國하여 버리고 守舊黨의 勢力이 또한 수그러지기 시작하니 開化黨의 一派는 다시 大院君을 받들고 일어나 모든 守舊黨을 몰아낸 뒤 金弘集을 首班으로 革新內閣을 세웠다. 淸國과 맺은 모든 條約을 버리고 그 宗主權을 否認하며 開國 紀年을 쓰는 등 獨立國家로서의 面目을 갖후게 되었다.
【官制改革】 먼저 官制를 改革하여 宮內 議政의 二府와 內務, 外務, 度支, 軍務, 法務, 學務, 工務, 農商務의 八衙門을 두며 다시 內政의 改造에 着手하여 勅令으로 寡婦의 다시 시집감을 許하며 嫡子와 庶子의 差別을 없이 하며 奴婢賣買들 禁하고 賤民을 虐待에서 解放하였으니 이를 甲午更張이라 부른다. 이 勅命은 일반 百姓에게는 대단히 好感을 주었으나 완고한 兩班들은 퍽 조와하지 않았다. 그 해 十月 下旬에 井上馨이 새로 全權大使가 되어 와서 大院君이 東學黨을 부채질함을 나물하므로 부득이 大院君은 다시 隱退하고 日本亡命에서 돌아온 朴泳孝 徐光範 등을 넣어 온전히 改革黨(開化黨)으로만 內閣을 組織하게 되었다. (首相은 역시 金弘集)
【下關條約】 그동안 淸日戰爭은 牙山灣과 成歡과 平壤戰에서 淸軍이 大敗하고 그 뒤 旅順과 威海威가 陷落되매 淸國은 和議를 提出하여 李鴻章과 伊藤博文이 下關에서 條約을 맺고 싸움을 끝였는데 그 條約에 依하여 朝鮮의 獨立을 完全히 承認하고 淸國은 遼東半島를 日本에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日本이 遼東半島를 가짐은 東洋平和 攪亂의 禍根이 된다 하여 露·佛·獨三國의 威壓的 干涉으로 도루 淸國에 돌려보내게 되니 이에 朝鮮政府는 日本의 弱함을 알고 親露的 傾向을 띄우게 되었다. 【親露派組閣】 이때 마침 朴泳孝 一派가 逆名을 쓰고 日本으로 亡命하매 親日派의 改革黨을 一掃하고 親露派를 重用한 第三次 金弘集內閣이 서게 되었다.
【乙未事變】 이에 분개한 改革黨은 日本 浪人들과 더불어 숨어있는 大院君을 움지기게 하여 【閔妃殺害】 高宗 三十二年 乙未(國紀 4228 西紀 1895) 八月 廿日 새벽에 景福宮에 들어가 王에게 請하여 親露派를 내쫓고 王妃閔氏를 죽이니 이것이 乙未事變이라는 것이다.
이 政變이 있은 뒤 새 內閣에서는 모든 改革에 손을 대이니 이듬해 陰曆에 대신하여 陽曆을 쓰고 種痘法을 施行하며 郵便을 開始하고 建陽이라는 年號를 세우며 또 斷髮令을 내리우고 王이 먼저 模範을 보이었다. 그러나 閔妃의 變과 斷髮令은 民心을 크게 흔들어 여러 곳에서 民亂이 일어나므로 親衛隊의 태반을 地方에 보내어 民亂을 討平케 하니 親露派와 露國公使는 이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露國 水兵 百名을 仁川으로부터 入京시켜 【俄舘播遷】 이 해 二月에 王과 王世好를 俄舘(露國公使舘)으로 모시어 所謂「俄舘播遷」을 敢行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首相 金弘集과 農商工相 鄭秉夏는 景福宮으로 달려가다가 民衆에게 맞아죽고 度支大臣 魚允中도 鄕里로 가는 도중에 맞아죽었으며 그밖에 大臣들은 모두 日本으로 亡命하니 朝鮮은 온전히 親露派의 독차지가 되었다.
【大韓國號】 王은 一年 뒤에 慶運宮(今 德壽宮)에 듭시고 年號를 光武로 갈로 國號를 大韓이라 定하며 그 해 十月 十二日에 皇帝卽位式을 擧行하였다.(國紀 4230 西紀 1897) 改革이 되자 새로운 空氣가 넘치기 시작하여 鍾路네거리에는 數萬의 群衆을 모이고 政府를 攻擊하여 民衆을 啓蒙하는 勢辯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獨立協會 設立】 이들은 앞서 建陽元年 가을에 米國서 돌아온 徐載弼을 中心으로 한 獨立協會의 鬪士들이었다. 國文과 英文으로 獨立新聞을 發刊하며 지난날 中國의 使臣을 맞아들이던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는 등 차차로 自主的 氣勢를 보이게 되었다. 【皇國協會對立】 獨立協會는 모든 것을 通하여 現政府를 배척하므로 政府에서는 洪鍾宇 李基東 등을 시켜 皇國協會라는 것을 組織케 하여 前者를 누르고저 八道에 行商하는 褓負商(大組織體 商人團) 數千人을 끓어들여 西大門에서 獨立協會와 衝突케 하니 양쪽에 많은 死傷者를 내었다. 興奮한 民衆은 李基東 外 大官들의 집을 쳐 부시고 소동을 일으키니 마침내 皇帝는 內閣을 갈게 하고 대궐문에 나서서 維新을 面約하므로 비로소 大衆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