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乙未事變)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자, 사대의 풍습에 익숙한 조선은 러시아의 강대함을 알고, 그들에게 의지하려는 생각을 깊이 하여, 몇 년 동안 국운(國運)의 발전을 유도한 일본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이 다수의 인명(人命)과 거액의 재화를 희생해 가면서 반도를 위해 힘을 쓴 효과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메이지 8년 【이 태왕 을미년 32년】 9월에, 미우라 고소(三浦梧樓)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대신 공사가 되어 경성에 부임해 온 후에는 친러파의 교만 방자함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던 훈련대(訓練隊)를 해산하고, 다시 친일파를 소탕하려는 친러파의 계획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전부터 민씨 일파와 서로 양립할 수 없던 대원군은 이러한 형세를 방관할 수 없자 스스로 입궐하여 국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에 그의 부하들의 호위를 받아 성 밖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을 나와 왕궁으로 향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인사들이나 군졸들로서 대원군의 거동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를 따랐다. 대원군은 광화문에서 나아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자 왕궁 수위(守衛) 병사들은 그를 저지시키려고 하였지만 격퇴되었다. 국왕은 정무를 모두 대원군에게 맡기고, 민씨 및 그 무리들은 모두 파면되었으며, 내각은 경질되어, 김굉집(金宏集)은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유길준(兪吉濬)은 내부대신(內部大臣) 대리(代理)에 임명되어 국정을 장악하였고, 그 외의 같은 무리 사람들도 많이 채용되었다. 이때 왕후 민씨의 행방과 안위가 불명확하였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난중(亂中)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소식이 도쿄에 전해졌는데, 일본국 정부는 이 사건에 일본인이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고, 일본과 조선의 국교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사실의 공명정대함을 기하기 위해 정무국장(政務局長)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경성에 급파하고, 이어서 미우라 공사 이하 관계자들을 소환하여 심사하였다. 국왕은 사변 직후에 칙령을 내려 왕후 민씨는 그 일족과 함께 국정을 저해한 사람이므로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0일】 이어서 빈호(嬪號)를 부여하였지만, 【11일】 12월 1일 【음력 10월 15일】 에 이르러 비로소 왕후 시해의 사실을 발표하고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이어서 국장(國葬)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 【음력 11월 13일】 에 이르러 10월 8일 사건의 흉도(兇徒) 세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대원군도 점차 정계(政界)를 멀리하였으며 메이지 31년 【광무 2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