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외교 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다
“그대 나라는 가까이에 있는 우리 거란을 멀리하고 바다 건너 송을 섬긴단 말이오?” “가까이 있다하나 여진이 길을 막고 있으니 우리도 어찌할 수가 없소. 여진이 없다면 당연히 거란과 교류하지 않겠소?” “여진이 없다면...”
많은 군사를 몰고 와 고려를 협박하는 거란 장수를 만나 당당히 담판을 벌인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담판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고려, 거란 사신을 유배 보내다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내세우며 북진 정책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지금의 평양)을 중요하게 여기며 대동강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했어요.
이즈음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북쪽 지역과 중국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어요.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당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은 중국 땅 전부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란의 옆에 있는 고려가 중국에 있던 송의 편을 들면 거란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하겠지요. 그래서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화해의 손짓을 보내며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했어요.
942년의 일이었어요. 거란에서 사신과 낙타를 보내왔어요. 하지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할 수 없다며 사신을 먼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를 개성의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 놓고 굶겨 죽였어요. 이 같은 고려의 행동은 거란을 크게 자극했고,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어요.
거란이 고려에 침입해 오다
나라를 정비한 거란은 993년 소손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입해 왔어요. 고려가 거란땅을 침범한 것을 벌하고, 거란 대신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를 내세웠지요. 국경을 지키던 고려군을 손쉽게 이긴 소손녕은 자신감을 얻은듯 고려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였어요.
거란군의 기세와 항복 요구에 고려 조정은 크게 당황하였어요. 신하들은 여러 가지 대책을 내세웠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일부 신하들 사이에서는 거란에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어요. 망설이던 성종도 화해하자는 의견을 따르려 했지요. 다만 서희만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어요.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던 서희는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았어요. 송과의 전쟁이 중요했던 거란에게 고려와 큰 규모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노련한 서희는 거란의 작전이 겁을 주어 송과 친한 고려가 쉽게 거란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챘어요.
소손녕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챈 서희는 성종과 다른 신하들을 설득하였어요. 그리고 목숨을 건 거란과의 협상에 나서게 되었어요. 이른바 ‘서희의 외교 담판’이 시작된 거지요.
거란 장수와 외교 담판을 벌이다
서희는 고려의 대표로 거란군 진영으로 갔어요. 서희가 소손녕과 서로 인사를 할 때였어요. 소손녕은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하였어요. 그를 아랫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었지요. 이에 서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어요.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군주에게 인사하는 예법이오. 두 나라의 신하가 만나 인사하는 예법은 아니오.”
라고 하며 단호히 거절하였어요. 소손녕의 거듭된 요구에도 서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지요. 여기서 밀리면 협상에서 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어요. 결국 소손녕은 서희와 대등한 예를 행하고 서로 마주 바라보며 앉았어요. 소손녕이 먼저 말하였어요.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침범해왔소. 또 고려는 우리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소. 이 때문에 지금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오. 그러니 만일 고려가 땅을 떼어서 우리 거란에게 바치고 우리와 교류한다면 물러날 것이오.”
이처럼 자기들이 고구려 옛 땅의 주인임을 내세우며 항복을 요구하였지요. 이에 서희가 대응하며 말하였어요.
“그렇지 않소. 고구려의 옛 땅이 곧 고려의 땅이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였고,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을 고려의 수도로 삼고 있소. 또한 그대 나라가 말한 국토의 경계로 따져 본다면 오히려 거란의 동경(지금 중국의 요양시)도 전부 우리 고려 땅이라 할 수 있소. 그런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시오.”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의미로 고려라 정한 것과 서경이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이었다는 점을 들어 고려가 진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정면으로 반박하였던 것이지요.
이어 서희는 소손녕의 두 번째 요구에도 강하게 맞받아치며 말했어요.
“또한 압록강의 안팎 지역은 원래가 우리 고려의 땅이었소. 그런데 지금 여진족이 고려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몰래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오. 더구나 여진이 완고하고 교활하게 길을 막고 있어 바다 건너 송과 교류하는 것보다 더 어렵소.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다 여진 때문이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고려의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짓고 길을 열게 만들면 어찌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않겠소? 장군이 만일 저의 말을 황제에게 전한다면 어찌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소?”
고려에서 거란으로 가려면 압록강 일대를 거쳐야 했죠. 그런데 이곳에 여진 부족들이 살고 있어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죠.
그리고 만일 압록강 일대의 여진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길을 낸다면 거란과 교류하겠다고도 했죠. 즉 여기 압록강 동쪽의 땅을 고려의 것이라 인정한다면 고려도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겠다고 한 것이지요.
서희의 말하는 기세가 매우 당당하고 일리가 있어 소손녕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어요. 이 정도면 고려가 거란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손녕은 이러한 사실을 거란의 황제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소손녕과 거란군은 물러나면서 서희에게 낙타, 말, 양, 비단 등의 선물을 주어 돌려보내죠. 거란 진영으로부터 외교 담판에 성공한 서희가 돌아오자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아가 맞이할 정도로 크게 기뻐하였지요.
다음해 994년 서희는 거란으로부터 소유를 인정받은 압록강 동쪽에서 여진을 몰아내고, 새로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삼았어요. 이 지역을 ‘강동 6주’라고 불러요. ‘강동’은 압록강 동쪽을 뜻하고, ‘6주’란 당시 고려의 행정구역 중 하나였던 ‘주’가 6개(흥화진·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란 뜻이에요. 거란의 속사정을 꿰뚫어 본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고려는 강동 6주라는 새로운 땅을 얻은 셈이죠. 또 서희의 활약 덕에 고려는 오랜 바람인 압록강까지 진출하게 되었답니다.
서희는 무력이 아닌 말로 큰 싸움 없이 외적도 물리치고, 게다가 고려의 영토도 넓힐 수 있었어요. 서희의 말에 이런 힘이 실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말이 갖는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