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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개태사(충남 논산시)>   

“나를 이어 왕이 되는 사람들은 내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 우리나라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를 장려하라. 그리고 모든 절은 풍수지리설에 맞추어 지어야 할 것이다 ...”

943년 죽음을 앞둔 한 왕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하는지 당부하는 열 가지 말을 남겼어요. 이 말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한 이 왕은 누구일까요?

후삼국 시대가 열리다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긴 왕은 왕건이에요.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이지요. 왕건의 집안은 후삼국 시대 대표적인 호족이었어요. 신라말부터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던 호족이 나타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통일 후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8세기 말부터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일어나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왕위 다툼으로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이 약해져 갔고,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어요. 게다가 도적의 무리가 전국에 들끓었지요.

혼란한 정국 속에서 지방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뭉쳐 방비하면서 신라로부터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였어요. 이처럼 지방에서 성장한 세력을 호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경주에서 내려온 지방 귀족이나 촌주, 군인, 상인, 농민, 도적 등 그 출신이 매우 다양했어요.

호족으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사람들을 모아 군사를 키웠지요. 그리고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일컬으며 지방을 다스렸어요. 호족 중 대표적인 인물로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이들은 신라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하였어요.

농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서남해안을 지키던 견훤은 892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하였고, 900년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후백제라 했어요. 신라 왕실 출신으로 승려가 되었던 궁예도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 함)라 했어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후고구려를 세우 궁예는 처음에는 부하들과 고생을 함께 나누며 일을 올바르게 처리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어요. 백성들은 궁예를 힘든 세상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궁예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면서 점차 신뢰를 잃어갔어요. 결국 궁예의 부하 장수였던 왕건은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어요. 그리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지요(918년).

고려, 후백제와 대립하다

의자왕의 원한을 갚고 백제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고구려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고려를 세운 왕건은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견훤이 노골적으로 신라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대야성을 비롯해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한 반면, 왕건은 직접 신라를 공격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신라는 신라 하급 장교 출신의 견훤을 역적으로 생각했고, 지방 호족 출신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지요. 신라는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신라가 고려의 편에 서서 움직이자 견훤은 고려와 신라 사이를 끊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어요(927년). 경애왕은 고려에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고려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서라벌로 쳐 들어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생포하였어요. 견훤은 자신을 따르지 않던 경애왕과 많은 왕족들을 죽이고 왕궁을 약탈하였지요.

<포석정과 경애왕>   

경주를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려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신라에 허수아비 왕(경순왕)을 세우고 군대를 돌렸어요. 경주에서 빠져나오던 후백제군과 신라를 돕기 위해 오던 고려군은 대구 공산(팔공산)에서 마주쳤고, 큰 전투가 벌어졌어요.

공산 전투 초반에는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고려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어요. 이때 왕건이 가장 아끼던 부하 장수 신숭겸이 나서 말하였어요.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대왕의 옷을 입고 싸우는 동안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공산전투>   

왕건은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신숭겸이 죽을 것을 뻔히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고 말았죠.

신숭겸은 왕건의 옷과 갑옷을 입고 군사들과 함께 후백제군의 진영으로 달려가 용감하게 싸웠어요. 이 틈을 타서 왕건은 병사 옷으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간신히 탈출하였어요. 신숭겸과 여러 병사들은 후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끝내 전사하였지요.

견훤의 후백제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신라 대목군(현 칠곡군)을 약탈하였고, 논과 밭에 쌓인 곡식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어요. 공산 전투 이후 고려군이 전투를 피할 정도로 견훤의 후백제는 한동안 후삼국 중 가장 강력했어요.

여러 호족들이 왕건을 따르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뛰어난 장수들과 병사들을 잃고 크게 패했어요. 하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히려 후삼국 통일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어요. 지방의 여러 호족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견훤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많은 호족들이 선물을 보내며 자신들을 인정해 준 왕건에게 스스로 와 복종을 맹세하였어요.

잔인한 견훤보다는 신라를 구원하고자 했던 왕건이 그들 자신의 땅과 지위를 지키는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에요. 심지어 상주의 호족이었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마저 왕건을 따를 정도였어요.

929년 견훤이 직접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어요. 그리고 왕건의 지지자였던 고을의 성주를 죽였어요.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내가 좌우 손을 잃어버렸다”고 성주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해요. 후백제군은 여세를 몰아 고창(안동)으로 진격하여 성을 에워싸고 거세게 공격하였어요. 고창은 고려가 경상도 지역으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 교통의 요충지였어요.

왕건은 위기에 처한 고창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남쪽으로 내려갔어요. 왕건이 고창에 오자 기다렸다는 듯 고창의 호족과 성민들이 왕건을 환영하며 그에게 투항했어요.

고창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사나흘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결국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 싸운 고려군이 후백제군 8천 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지요. 견훤은 겨우 살아 도망치기 급급했어요.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 주변의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이 왕건에게 복종을 맹세하였어요. 그리고 민심이 고려에 기울자 신라 경순왕도 나라를 왕건에게 넘겨주었지요.

고창 전투 이후 후백제의 국력은 빠르게 약해졌어요. 게다가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후백제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요. 견훤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은 그중 넷째 금강을 특별히 사랑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였어요. 그러자 견훤과 함께 전쟁터를 돌며 공을 쌓았던 맏아들 신검은 이를 따르지 않았지요. 그는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어요.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은 몰래 도망을 쳐 왕건에게로 갔어요. 그리고는 심지어 스스로 앞장서서 고려군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했어요. 견훤이 앞장서서 싸우니 신검의 후백제군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어요. 이로써 936년 왕건은 고려의 힘만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어요. 고려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궁예의 부하 장수였던 왕건이 고려의 왕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를 어떤 나라로 만들고 싶었을지 생각해 보아요.

<고려와 후백제와의 격전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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