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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탕평책을 펼치다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헐레벌떡~ 자네들, 소식 들었는가?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는군.” “엥? 무슨 말인가? 얼마 전까지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는가? 믿을 수 없네. 헛소문일 것이네!”

안타깝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은 사실이에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영조였어요.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세자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영조는 오랜 기간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나갔을까요?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다

“우리 노론 대신들은 무조건 연잉군을 지지하오.” “그럼, 우리 소론 대신들은 무조건 경종을 지지하오.”

조정은 숙종의 뒤를 이어 누구를 왕으로 정할지 논쟁하고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경종의 편을 드는 소론과 연잉군의 편을 드는 노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어요.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론은 역모를 일으켰다고 모함해 노론을 조정에서 몰아냈지요. 이때 연잉군 또한 목숨이 위태로웠어요.

“전하, 저는 이번 역모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만 왕세제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다행히 대비의 도움으로 연잉군은 겨우 목숨을 지켜 내었어요. 연잉군은 자기 이익에 따라 사람들을 죽고 죽이는 붕당 간의 다툼이 너무도 무섭고 싫었지요.

처음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친 각 붕당들은 치열한 논쟁을 하며 사이좋게 나랏일을 하였어요. 이때는 나름 정치가 균형을 이루어 발전하였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 붕당들은 백성을 위함이 아닌 자기 붕당의 이익을 위해 상대편에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였어요. 문제는 정도가 심해져 우리 편이 살기 위해 다른 한 편이 망해야 된다는 사생결단식 보복전의 다툼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영조, 드디어 탕평의 깃발을 올리다

1724년 경종이 4년 만에 죽자 연잉군은 드디어 왕위에 올랐어요. 이제 소론이 물러나고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지요.

“오늘도 신하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만을 하는구나. 백성은 없고 자기 당만 있구나.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어.”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 역시 붕당 정치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붕당 간의 다툼이 얼마나 나쁘고 무서운지 영조 자신은 잘 알고 있었어요.

“더 이상 신하들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리자!”

<탕평을 명하는 영조>   

영조는 붕당 정치를 잠재우기 위해 인재를 고루 써서 나라를 올바로 세우기로 결심하였어요. 신하들에게 말했어요.

“들으시오! 그대들이 지금 붕당을 지어 서로 헐뜯고 다투니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소. 이에 나는 탕평의 뜻을 세워 앞으로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쓸 것이오!”

마침내 영조는 신하들에게 ‘탕평책’을 선포하였어요. ‘탕평’은 유교 경전에서 따온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히 한다는 뜻이에요.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우두머리를 불러 서로 화해하도록 하였어요. 따르지 않는 신하들은 과감히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여 자신의 뜻을 강하게 보여 주었어요. 관직도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소론 중에서 뽑았어요. 어느 한쪽의 힘이 세지지 않도록 균형 있게 등용하였어요. 또한 상대편 잘못을 역모로 몰아서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는 보복 정치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노력하였어요.

<탕평비(서울 종로구)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쓰여 있어요. >   

한편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 신하들이 언제라도 탕평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뜻에서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어요.
강력한 탕평 정책 덕분에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들을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었어요.

백성들을 위해 군포의 부담을 줄여주다

“자네 이리도 급하게 어디 가나?” “군역 때문에 더 이상은 못살겠어. 그래서 도망가려고.” “심정은 알겠네만, 안되네. 그럼 내가 대신 군역을 져야해.”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나면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나갔어요.
그런데 백성들은 평소 농사일로 매우 바빴어요.

“농사일 할 남자들이 군인으로 나가면 농사는 누가 짓나?”

군역은 백성들에게 생계가 달린 심각한 문제였어요.

“여보게, 1년에 2필의 군포를 내면 면제받는다네.”

그러나 이 역시 백성들의 생활 형편에는 큰 부담이었어요. 더구나 관리들이 갓 태어난 아들이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군포도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있었어요.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힘들어졌고, 불만도 높아져 갔지요. 견디다 못해 마을을 떠나는 백성들도 늘어나게 되었고요. 이런 사정을 안 영조는 백성들을 위해 결단을 내렸어요.

“여봐라. 1년에 2필씩을 받던 군포를 1필씩만 걷도록 하라.”

영조는 백성들을 위해 ‘균역법’ 시행을 명하였어요. 백성들은 환영했어요. 그러나 양반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지요.

“아니 되옵니다. 전하. 나라 재정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에게 혜택이 된다면 누가 원망한들 감당하겠노라.”

백성들을 위한 영조의 뜻은 굳건하기만 하였어요. 영조의 균역법은 당시 백성의 괴로움을 크게 덜어준 개혁 정치였어요.
영조는 백성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많이 걱정하였어요. 늘 스스로 검소하게 지냈으며 양반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못하게 하였어요.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을 최대한 줄이고자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고,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어요. 끔찍한 형벌들도 없애버렸고요.

<준천시사열무도(청계천을 정비하는 모습)>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또한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도성에 사는 백성들이 잦은 물난리로 겪는 피해를 덜어주고자 하였어요.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를 아시나요?

영조의 첫 번째 아들인 효장세자가 열 살의 나이로 죽고, 7년 만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사도세자예요.

“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내가 힘써온 탕평을 잇는 뛰어난 임금이 될 거야.”

영조는 어린 사도세자 세자를 많이 사랑하고 아꼈어요, 기대 또한 컸어요. 하지만 세자는 커 갈수록 공부보다는 무예 등을 더 좋아하였어요.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못마땅해 하였어요. 치열한 붕당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똑똑해야 져야 된다고 생각하였지요.

어느 날 영조는 자신을 대신해 사도세자에게 나랏일을 맡겼어요. 사도세자는 노론의 뜻과 상관없이 정치를 하였어요. 노론은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사도세자를 싫어했지요.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이간질하였어요.

영조는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었어요. 그리고 엄격하게 대하였어요. 사도세자는 그런 영조를 더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결국 세자는 너무 힘들어 더 삐뚤게 행동하였어요. 심지어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까지 하였어요. 틈을 노리고 있던 노론은 세자의 잘못들을 적어 영조에게 일러바쳤어요. 영조는 몹시 화났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속상하고 힘들지만 나라의 앞날을 위해 결정해야만 하였어요.

“세자는 관을 벗고 이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아바마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네가 끝내 자결하지 못하는구나. 여봐라!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라. 앞으로 세자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둔 영조>   

세손까지 와서 애원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살려달라 울부짖던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갈증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영조는 탕평책을 강하게 펼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하였어요. 그 결과 영조 대는 나라가 발전되고 풍요로워졌지요. 하지만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붕당 정치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였어요. 심지어 붕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들었지요.

아무리 정치 상황이 복잡하고 힘들어도 사도세자를 꼭 그렇게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만약 영조의 탕평책이 제대로 펼쳐졌다면 이후 조선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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