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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백성을 위한 세상을 꿈꾸다

<수원화성박물관(경기 수원시)>   

“자네, 요즘 수원 화성을 짓는데서 일한다고 했지? 힘들겠구먼. 이번엔 또 언제나 다 지을지…” “아닐세. 예전보다 그리 힘들지 않다네. 오히려 난 요즘 일하는 게 즐겁다네. 이게 다 어느 젊은 학자가 만든 거중기라는 기구 덕분이네. 한번 구경 오게나.”

수원 화성은 어떻게 지었을까요? 거중기는 화성을 건설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요? 거중기를 발명한 젊은 학자는 누구일까요?

실학의 세계에 눈을 뜨다

아버지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정약용의 집은 한양으로 이사하게 되었어요. 정약용은 한양에 살면서 여러 사람과 만나게 되었고 학문과 식견의 폭도 넓어졌지요. 정약용은 누나의 남편이 되는 이승훈의 소개로 이가환이라는 큰 학자를 만났어요.

“유학은 지금까지 이론만을 따지고 있네. 백성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니 어찌 올바른 학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이가환은 이익의 『성호사설』을 건네주었어요. 정약용은 그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그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동안 공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학문은 현실 생활에 실질적인 이로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백성의 삶이 넉넉해지려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양반들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

이익의 학문은 정약용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특히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자는 실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익은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이라 할 수 있어요.

한강을 건너는 문제를 해결하다

“이제부터 매년 현륭원을 참배하려 하오.” “전하, 한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강을 건너려면 수십 척의 배가 필요합니다.”

정조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어요.

“가서 정약용을 불러 오시오.”

정약용은 학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일찍이 서학을 공부해 과학 기술 분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전하, 한강에 배를 이용해서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 편할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설치하면 시간과 돈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배다리라? 그거 좋은 생각이오. 역시 정약용이오. 그대가 배다리에 대한 설계를 맡아 해 주시오.”

정약용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배다리를 설계해 나갔어요. 마침내 커다란 배 80여 척을 옆으로 나란히 세워 두고 그 위에 판자를 얹은 대규모의 설계도가 완성했어요. 언뜻 쉬운 일 같지만 배들이 물결을 따라 밀리는 것을 막고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해야 하는 등 연구할 일이 많았어요. 특히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 때 어떤 영향이 있는지, 한강의 어느 지점에 배다리를 놓아야 적당한지를 알아내야 했지요.

정약용은 설계도에 배와 배 사이의 간격, 판자의 너비와 두께, 배들이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방법 등 수십 가지의 내용들을 기록하였어요.

정약용의 치밀한 설계대로 드디어 배다리가 완성되었어요.

“우와, 저기 좀 봐. 한강에 배로 만든 다리가 놓였어.”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는 소문에 전국에서 이를 구경하러 백성들이 몰려들었어요. 구경꾼들은 마냥 신기해하였어요.

정조는 완성된 배다리를 보며 크게 기뻐했어요. 정약용도 배다리를 안전하게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매우 흡족하였지요. 지금의 용산과 노량진 사이에 놓였던 이 배다리 덕택에 정조는 손쉽게 한강을 건너 화성까지 다녀올 수 있었어요.

<한강주교환어도>   
국립고궁박물관

새로운 첨단 도시 수원 화성을 설계하다

정조는 수원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어요. 이곳을 제2의 도읍지로 삼아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하였지요.

“수원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고 하네. 그대가 이 중차대한 일을 맡아서 해 주게.”

정약용은 화성 설계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어요. 지식이 풍부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진 정약용은 화성 설계의 적임자였지요.

우선 수원은 사방이 확 트여 있어 혹시 모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와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성이 필요했어요.

‘흙과 돌을 쌓아서 만든 기존의 성들은 너무 약해. 좀 더 튼튼하게 성을 쌓을 방법이 없을까? 그래. 벽돌을 사용하면 화재에 약하고 쉽게 무너지는 단점을 해결할 수 있어.’

정약용은 튼튼한 성을 쌓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어요.

화성에는 그동안 조선의 성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기능이 필요했어요. 다양한 자료를 살펴보던 정약용은 청의 책들까지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그러다 이상적인 성의 모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의 곳곳에 갖가지 방어 장치를 두었어요. 성문 앞을 반원 형태로 만들어 성을 쌓고,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만들고, 적의 화공에 대비해 물을 쏟는 장치도 만들었어요.

“전하, 수원에 쌓을 성의 설계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정약용은 설계도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어요. 정조는 매우 만족해하며 활짝 웃었어요.

<수원 화성>   

거중기를 사용하여 백성들의 수고를 덜다

정약용은 서양인 신부가 편찬한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해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라는 기구를 발명하였어요.

“이것은 거중기라 하옵니다. 돌같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하는 기구이옵니다.”

정약용은 정조와 신하들 앞에서 거중기를 작동시켰어요. 거중기가 움직이자 여기저기서 감탄의 소리들이 터져 나왔어요.

“우와, 움직인다! 정말 놀라워!”

정조와 신하들은 자유자재로 돌을 운반하는 거중기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어요. 거중기 덕분에 힘을 덜 들이고 성을 쌓을 수 있었어요.

<거중기를 이용한 화성 건설>   

또 정약용은 무거운 물건을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유형거’라는 수레도 만들었어요. 수레바퀴에 수평을 유지하는 장치를 달아서 경사진 곳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였지요.

정약용이 거중기와 유형거를 만들어 사용한 덕에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야하는 백성들은 수고를 크게 덜었어요. 또한 성을 쌓는 공사비용과 기간도 크게 줄일 수 있었지요.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였고, 정조도 매우 기뻐하였어요.

정약용은 천문, 물리, 농사, 의학 등 과학 분야에 해박했어요. 지식을 갖고 있었어요. 화성 건설은 실학자 정약용의 재능이 충분히 드러난 일이라 할 수 있어요.

천주교 문제로 시련을 겪다

“아 이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란 말인가?”

갑작스레 정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정약용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정약용은 그만 목메어 울었어요.

정약용에게 정조는 어떤 위험에도 자신을 든든하게 보호해 준 아버지였고, 학문을 이끌어준 스승이었고, 세상에서 뜻을 나눌 수 있는 친구였어요. 자신을 알아주고 지원해 준 정조를 만나 정약용은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 수 있었지요. 정조가 없는 세상은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위태로웠어요.

1801년 조정은 천주교를 나라의 윤리와 가르침을 배반하는 사악한 학문으로 여기고, 천주교도를 역적의 죄인으로 다스리겠다고 명을 내렸어요.

정약용의 집안사람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신자가 많았어요. 정약용도 한때 믿었다는 이유로 잡혀갔어요.

“죄인 정약용에게 묻겠다. 이가환, 이승훈과 함께 천주교의 소굴을 만든 것이 사실이냐?” “저는 한때 천주학을 믿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 천주학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대답은 논리적이었고, 천주학에 계속 관여하였다는 증거는 없었어요.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되었어요.

유배지에서 학문의 꽃을 피우다

1801년 11월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 도착했어요. 정약용이 머무는 곳은 비좁고 초라했지만, 정약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독서와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였어요. 누구 하나 따뜻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고, 주위에는 그를 경계하여 감시하는 차가운 눈만이 있었어요.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그러다 정약용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가르침을 주겠소.” “그래도 부디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부탁했어요. 이 같은 일이 계속 되자 언제 귀양살이에서 풀려날지 모르니 백성들을 위해서 글이라도 가르치기로 다짐하였어요. 정약용은 백성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도록 하였어요.

강진 생활 8년 째 제자가 마련해 준 조그만 집으로 머물 곳을 옮기게 되었어요. 그 집이 다산이라는 산 밑에 있었는데 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지었어요.

정약용은 곧바로 책을 쓰는 일에 힘을 쏟았어요. 붓과 벼루만을 곁에 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았어요. 어깨가 마비되고 시력이 나빠져 안경에만 의지하게 될 정도였어요.

유배 생활은 고통스럽고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어요. 하지만 19년의 강진 유배 생활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접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더욱 힘쓸 수 있었던 값진 기간이었어요.

<다산 초당(전남 강진군)>   
문화재청

정약용은 긴 유배 기간을 잘 활용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많은 책을 썼어요. 그 중 지방 수령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도리를 담은 『목민심서』는 그의 대표적 저서에요.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후세에 길이 남길 위대한 학문을 완성한 것이에요.

<정약용의 3대 저서>   

정약용은 뛰어난 과학적 재능으로 배다리를 설계하고 수원 화성을 지었어요. 또 직접 수령이 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도 하였어요. 정약용은 백성에 대한 사랑을 학문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옮긴 큰 학자였어요.

만약 자신을 든든히 지원해 준 정조가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재능이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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