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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사람이 한울님임을 알리다

<용담정(경북 경주시)>   

“내라는 세금은 많고,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나라는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고. 무슨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네.” “용담정에 가보았는가? 난 지난번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작은 깨우침을 얻었다네. 함께 가보세. 자네도 곧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될 걸세.”

용담정에 계신 스승님은 누구일까요? 스승님의 말씀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을까요?

최제우, 용담정에서 깨달음을 얻다

1824년 어느 날 경주 구미산 아래 작은 시골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어요. 이 아이가 누구일까요? 바로 용담정 스승님이라 불리는 최제우에요.

최제우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이었지만,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못하여 생활형편이 어려웠어요. 최제우도 집안을 위해 생계를 도와야 했지만 총명했기 때문에 유학과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17세에 최제우에게 큰 시련이 닥쳤어요. 존경하고 따랐던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신 거예요. 슬픔과 아픔이 매우 컸어요. 더구나 농사일도 전혀 몰라 살길이 막막했어요.

“그래! 생계를 위해 일단 돈을 버는 거야.”

그에게 공부는 더 이상 사치에 불과했어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장사의 운이 없었는지 돈을 모으지는 못했어요. 이로 인해 최제우는 의술이나 점복술을 접하기도 했고, 무술을 익혀 무과에 응시하려고도 생각했어요. 유학을 공부한 선비로서 이익을 위해 다투는 일들이 힘들기만 하였지요. 마음마저 허전하였어요.

“에휴~ 내가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는데…”

하지만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면서 그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어요. 특히 서양 세력이 청을 침략하고 그들이 믿는 서학이 들어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았지요.

“세상 돌아가는 게 뭔가 이상해. 유학의 가르침도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어.”

최제우는 큰일이다 싶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지요. 비록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신세지만, 유학자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그냥 대수롭게 보아 넘길 수가 없었거든요.

그는 깊은 산 암자에서 명상과 독서, 기도를 하였어요. 이때 자신의 이름도 ‘어려움 속에 빠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에서 성묵에서 ‘제우(濟愚)’로 바꿨어요.

그러던 1860년 4월 어느 날, 그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요.

“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야. 한울님을 만났거든.”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다

최제우는 한동안 동굴 안에서 한울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공부하였어요.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어요.

“그래! 한울님의 말씀이 진리다. 세상에 알려야겠다.”

37세의 최제우는 평범한 선비에서 동학의 스승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최제우는 산속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한울님에 대해 말해 주었지요.

<백성들에게 동학을 전하는 최제우>   

최제우는 항상 겸손하였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사람들을 공경하는 태도를 가졌어요. 이것이 바로 동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이에요.

모든 사람이 한울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위적으로 대할 수 있겠소? 그러니 사람을 잘 받드는 것이 한울님을 잘 받드는 것이지요.

성스러운 기운을 타고난 인간을 하늘처럼 공경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동학은 귀천에 관계없이 인간을 누구나 평등하게 보았어요. 이런 최제우의 가르침에 감동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어요. 그는 동학을 알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문 밖까지 나가서 고개를 숙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맞이하였어요.

사람들은 미천한 신분일수록, 천대를 받았던 아픔이 클수록 동학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사람들은 최제우를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기 시작하였어요. 어느새 동학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어요.

보통 종교에서는 교주들을 신성하다며 떠받드는 경우가 많은데, 동학은 그렇지 않았어요. 최제우는 그저 ‘스승님’으로 호칭되었지요. 한울님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2년이 지난 어느 날, 최제우는 이상한 술법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죄명으로 경주의 관아에 체포당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최제우의 제자 수백 명이 관아로 몰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소연하였지요.

“하늘과 사람에게 공경하라는 가르침이 어찌 사악한 가르침이란 말이오?”

최제우가 체포된 그날부터 관아는 늘 사람들로 시끌벅적하였어요. 그러자 경주의 수령은 일이 커질까 고민했어요. 곧 최제우는 풀려났어요. 이 소식에 제자들은 뛸 듯이 기뻐했지요.

“역시 스승님이 옳았어. 관아에서도 동학을 인정하였어.”

이 사건 이후로 최제우에 대한 소문과 영향력은 더더욱 확산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전역으로 번져 나갔어요.

“한울님의 말씀이 잘못 전달되면 어떻게 하지?”

교세가 확장되자 새 고민이 생겼어요. 그는 궁리 끝에 각 지역에 ‘접’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접주’라는 대표자를 세웠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담긴 글을 주었지요.

이로 인해 동학은 더욱 쉽게 백성들 속으로 퍼져 나갔어요.

최제우의 죽음, 그러나 동학은 계속 이어지다

최제우는 동학의 창시자로서의 지위를 오래 누리지 않았어요. 조직적인 ‘접’ 제도를 만들었으니, 이를 책임감 있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였지요. 최제우는 2년 만에 2대 교주를 임명하였어요. 그가 바로 최시형이에요. 동학은 최시형이라는 후계자를 잘 뽑아 더욱 단단해 졌어요.

동학에 대한 탄압을 미리 짐작한 것일까요? 동학을 정비하고, 후계자를 뽑고 얼마 안 되어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체포를 당했어요. 그가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요. 최시형이 변장하고 찾아왔지요.

“스승님! 감옥지기에게 손을 써 놓았으니 어서 탈출하세요.”

최제우는 아무 말 없이 곰방대를 하나 건네며 고개를 저었어요. 최시형은 스승의 뜻을 짐작하고 눈물로 이별하고 돌아섰어요. 집에 와서 보니 곰방대 속에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나는 순순히 하늘의 명을 받을 것이다. 슬퍼하지 말고 너는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

죽음을 앞두고 남긴 최제우의 가르침!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에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어요.

아우이자 동지였던 최시형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고자 하였던 최제우의 사랑과 사명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에요.

이 세상에 한울님이 아닌 것이 없고, 한울님은 모두 공경의 대상이며 내 안에서 사랑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하는 동학의 가르침이 최제우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어요.

결국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고 말았어요. 37세에 깨달아 동학을 세우고 40세에 체포당했으니 그가 동학의 스승으로 살았던 생애는 3년 반 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사상은 『동경대전』 속에 영원히 남아 있어요.

동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동학은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백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최제우나 최시형 등과 같은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말이에요.

최제우의 가르침에 전국적인 동학도들이 생겼다는 것은 백성들이 바라는 그 무엇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에요.

19세기는 세도 정치라고 해서 왕권은 약화되고 특정 또는 몇몇 가문의 권력 다툼이 잦은 때였어요. 그러다보니 세력가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지요. 탐관오리가 판을 치자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어요.심지어 세금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유랑민으로 떠돌기 일쑤였지요.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어요. 한때는 전국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민란이 발생할 정도로 민심은 흉흉했어요.

한편 ‘서학’이라는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한때 사람들은 서학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도 하였어요. 하지만 큰 나라로 섬겼던 청이 서양 세력에 맥없이 무너지자, 서학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지요.

상황이 이런데도 당시 지배층들은 성난 민심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어요.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만 관심을 두었지요.

백성들은 시대와 정치를 비관하며 스스로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민간 신앙을 믿었어요. 예언 사상, 미륵신앙, 굿이나 살풀이의 무속 신앙 등이 유행하며 사람들의 불안함을 달래 주곤 하였지요. 하지만 이것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동학은 달랐어요. 동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져 있던 소박한 소망과 염원과 유, 불, 선 그리고 천주교까지 포함하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동학은 당시의 모든 사상을 포용한 종합 종교라 할 수 있었어요.

전통 유학자 가문에서 유학을 깊게 공부한 최제우가 창시했고, 우리나라 전통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은 한학과 유학을 공부한 대다수 몰락 양반에서부터 천민에게까지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될 수 있었어요.

뒤숭숭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동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사람들은 최제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지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동경대전은 동방에서 생긴 학문(동학)의 경전을 말해요. 한문으로 쓴 동경대전이 사대부와 지식인을 위한 것이라면, 한글로 된 용담유사는 대중적인 교리서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조선 시대가 사농공상의 구분이 뚜렷한 신분 사회였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동학의 사상은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이었어요. 어찌 보면 근대의 인간 존엄 사상이나 평등사상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할 만하지요.

동학의 사상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힘들고 지친 백성들에게 깨우침을 주었고,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어요.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항일의병 정신으로 이어졌지요.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이나 대표적 민족지도자인 백범 김구도 모두 동학을 믿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오늘날까지 동학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최제우 동상(대구 중구 달성공원)>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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