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신식 결혼식
조선시대에 유교식 절차를 중시하던 혼례는 조선 말기가 되자 서양 종교와 새로운 사조의 영향으로 점차 새로운 양상으로 변해 갔다. 즉, 절차의 간소함 때문에 이른바 개량 결혼식이 구식 혼례를 물리치고 조금씩 퍼져 나갔던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기독교인 사이에는 신랑과 신부가 상대편의 머리를 쪽 지어 주고 상투를 틀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이른바 ‘복수결혼(福手結婚)’이 성행하였다. 이때 복수란 쪽을 지어 주고 상투를 틀어 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244) 가까운 친척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물을 떠놓고 한 이 결혼식은 신식 결혼식이지만 조선시대 가난한 사람들이 행하던 빈자(貧者) 결혼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비용이 적게 들어 하층민에게 당연히 인기가 있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신부의 집전으로 혼배 성사(婚配聖事)가 행해졌으며, 천도교에서도 독자적인 신식 혼례 방식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또한 1900년대에 들어서는 법사의 주례로 불교식의 ‘불식 화혼법(佛式花婚法)’ 이란 개량 혼례가 신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신도가 아닌 사람도 불교식 결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밖에도 근대적 사회 운동을 벌이고 있던 계명 구락부 회원들이 올렸던 고천식(告天式) 결혼도 광복 후까지 계속 보급된 가장 간략한 결혼 방법이었다. 그것은 상고문을 읽는 것만으로 결혼식 절차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245)
아무튼 근대의 물결을 타고 불어 닥친 이른바 신식 결혼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의 주례로 1888년 3월 정동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진 한용경과 과부 박씨의 결혼식이 처음이라 한다. 이를 ‘예배당 결혼’이라고도 불렀는데, 신랑·신부 앞에서 목사가 결혼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혼 증빙(結婚證憑)’이라는 결혼 증명서에 결혼 당사자뿐 아니라 친권자·주례·증인의 도장을 찍는 것으로 결혼한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켰다. 이 같은 신식 결혼식은 기독교 전파에 따른 교회 설립으로 점차 늘어 갔다. 신문지상에 등장한 최초의 결혼식은 1920년 4월 15일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이다. 이들은 서울의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후 식장은 다양해졌다. 예배당으로 불린 교회와 절,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강당 등 공공 기관이나 명월관 같은 대형 요리점도 이용되었다.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