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 결혼식 모습
신식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우선 예복으로 신랑은 모닝코트를 입었고 신부는 면사포를 썼다. 하얀 드레스 대신에 당시에는 흰색 한복에 흰 버선, 고무신을 신어 한식과 서양식이 절충된 것이었다. 식장에는 모닝코트와 면사포 등을 빌려 주는 예식부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들러리가 있어 신랑 옆에 남자 둘, 신부 옆에 여자 둘이 섰고, 앞에 어린이 둘을 세웠다. 들러리의 의상은 신랑·신부와 같았고, 예식이 끝난 후 퇴장할 때 손님들은 색종이 테이프를 던지고 날콩과 팥 등 곡식을 뿌려 축하했다. 이는 아들딸 많이 낳고 부자로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식이 끝나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펑 터지는 폭약(爆藥) 소리에 사람들이 겁을 먹기도 하였다.
피로연은 신랑·신부 각자의 집에서 했고, 신혼여행을 가는 예는 드물어 택시로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상당한 호사였다. 이런 신식 결혼식은 주로 신여성이나 일부 부유층, 기독교 문화를 접한 사람들 중심으로 행해졌다. 결국 당시 서구적인 것을 선호하던 여성들에게는 신기하고도 이상적인 혼례로 비쳐졌다. 이처럼 서양식, 이른바 신식 결혼은 1920년대 이래 점차 확산되어 갔다.
교회·절·공공장소 등에서 한 신식 결혼은 통칭 ‘사회 결혼’으로도 불렸는데, 1920년대 초기가 되면 장소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행하였다. 이에 예식장이란 것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예식장 앞에는 결혼식 복장을 빌려 주는 가게도 생겨났고 신부 화장을 전문으로 하는 미장원도 나왔다. 당시 영화배우 출신의 오엽주(吳葉 舟)는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 화장 미용원을 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결혼 절차도 반드시 신식·구식의 차원을 넘어 신구 혼례의 혼합이나 절충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신혼여행 과정까지는 신식 결혼 절차를 따랐지만 혼례 장소가 신부 집에서 예식장으로 바뀌었을 뿐 아직 전통적인 과정이 그대로 행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즉, 초행·신행 등의 전통 혼례 절차가 신식 혼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소멸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인 신식 혼례와 결합하여 변형·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