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결혼의 이면
신식 결혼의 등장은 종교적·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전통적인 유교식 혼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힘입은 것도 사실이다. 당시 계몽 운동이 전통 혼례를 지속적으로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인식하였던 점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신여성의 결혼이 당시에도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결혼 선물과 신혼여행 아니면 결혼 의식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광고 결혼’이 되어 버린다는 사회적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그것은 바로 여성이 결혼을 우상화하거나 아니면 결혼의 노예가 되어 감을 내포한 것으로, 자유연애·자유결혼에 대한 여성의 환상이 곧 현실 사회에서 부딪칠 괴리와 모순을 안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당하던 신여성의 모습이 오히려 퇴색하고 종전과 같은 가정생활에 예속되어 안주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원치 않던 길로 나갈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 가부장제가 안고 있는 근대성의 함정이라면 함정일 것이다.
결혼 풍습은 1930년대에 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 1934년 조선 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의례 준칙’은 전통 관혼상제의 풍습을 사장시키고 혼인 장소로는 신사(神社)도 이용토록 하는 등 일반 대중의 결혼식에 대한 인식과 부담을 덜어 주었다. 특히 혼례의 간소화는 1937년 일제의 중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정책적으로 강조되었다. 일례로 결혼 비용을 서양 사람들은 연간 수입의 3할 가량을 사용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수의 세 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낭비한다고 지적되었다. 따라서 결혼 비용을 절감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의식이 성장하고 사회적 인식이 변함에 따라 나온 것이라기보다 일제의 물자 절약을 위한 통제 정책의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