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성립 배경과 그 과정
조선 건국을 주도한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널리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눌 수 있다. 관학으로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이 있었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 한양의 동·서·남·중부에 설치한 4부 학당과 지방 교육 기관인 향교 등이 있었다. 사학으로는 서재, 서당 등이 있었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서원이 지방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세운 최고 교육 기관이다. 성균관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성균관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聖賢)을 배향(配享)하는 일과 학생을 교육하여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 내는 일을 하였다. 문묘(文廟)를 만들어 성현을 배향하는 것은 성리학적 이념을 백성에게 널리 보급하고 교화하려는 상징적 행위였으며,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현실적 행위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이름에도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성균관의 ‘성(成)’은 ‘인재를 기른다(成人材之未取)’는 의미이 며, ‘균(均)’은 ‘풍속을 고르게 교화한다(均風俗之不在)’는 의미이다.
성균관은 1298년(충렬왕 24)에 당시 최고 교육 기관이던 국자감(國子監)을 성균감(成均監)으로 개편하여 설립하였다. 그 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하였고, 1356년(공민왕 5)에 반원 정책에 따른 관제(官制)의 환원으로 국자감이라 하였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성균관은 고려의 국자감을 이름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국자감에서는 유학과 더불어 기술학을 함께 교육하였으나 기술학은 분리시켜 해당 관서로 옮기고 성균관에서는 유학만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유학 학부에 명경학(明經學)을 추가 설치하고 명경박사(明經博士)와 명경학유(明經學諭)를 두었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종래의 사장학(詞章學)·훈고학(訓詁學) 중심의 유학이 경학(經學)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고려 말의 성균관은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신진 사대부들은 교육을 통해서 성리학 이념을 확산시키고 통치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하였다. 따라서 1394년(태조 3)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가장 먼저 궁궐, 종묘, 사직 등과 함께 성균관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397년(태조 6)에는 성균관에 성현을 배향하기 위한 시설인 문묘를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그렇지만 성균관은 1400년(정종 2)에 문묘의 대성전(大成殿)이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개경 환도와 왕자의 난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407년(태종 7)에는 불타 없어진 문묘와 건물을 복구하였다. 태종 때 성균관과 문묘를 완공한 후에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 비문(文廟碑文)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을 살펴보면 당시 성균관은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을 비롯하여 각종 건물이 모두 96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나라의 근본은 백성의 교화에 있으며, 교화와 인재 양성은 학교에서부터 나온다.”라고 생각한 당시 지배 세력의 교육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성균관은 국학(國學), 태학(太學), 반궁(泮宮)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성균(成均)은 중국 주(周)나라 때 남쪽에 있는 학교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천자(天子)의 나라였던 주나라에는 중앙에 벽옹(辟雍), 동쪽에 동서(東序), 서쪽에 고종(瞽宗), 남쪽에 성균, 북쪽에 상상(上庠)이라는 다섯 학교를 두었다고 한다.74) 국학이나 태학은 국가의 최고 교육 기관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대신에 특히 반궁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반궁은 『시경(詩經)』에 “태학에는 동·서·남쪽의 삼면에 반수(泮水)라는 물길을 만들어 흐르게 하였다.”는 글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성종 때 성균관의 여러 부속 건물을 완성한 뒤 성균관 주변에 반수, 즉 개울을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다리를 놓아 건너다니게 하였다. 성균관에 반수를 두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교가 성현을 배향하고 유생이 공부하는 중요한 공간이기 때문에 주변과 분리하여 정숙하게 하고,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성균관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는 근궁(芹宮), 현관(賢關), 수선지지(修善之地) 등이 있었다.
성균관은 임진왜란 때 건물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1601년(선조 34)부터 성균관 복구 사업을 시작하여 문묘와 명륜당 등 주요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존경각(尊經閣), 정록청(正錄廳) 등 부속 건물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비천당(丕闡堂), 육일각(六一閣) 등 새로운 건물도 세워 규모가 전보다 커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균관 건물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의 성균관 명륜당 앞에는 500년이 넘은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예를 가르쳤다는 이야기 때문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에는 은행나무를 많이 심는다. 은행나무의 상징성 때문에 성균관을 행단(杏壇)이라고도 불렀다.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던 윤탁(尹卓)이 심은 것이다. 윤탁은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제대로 뻗는다.”라고 하여 유생들에게 학문의 근본에 힘쓰라는 뜻으로 은행나무 한 쌍을 심었다고 한다.75) 성균관에서 과거 시험이 있을 때 유생들이 은행나무 옆에 앉으려고 서로 다투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꿈을 꾸었는데, 큰 용이 성균관 은행나무를 휘감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 성균관 은행나무에 가보게 하였더니 그곳에 한 선비가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과거를 보았는데 바로 그 선비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선비는 바로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하고, 세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최항(崔恒)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는 유생들에게 학문에 힘쓰고 과거에 합격하라는 의미가 더해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