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1. 성균관성균관의 건립과 발전

성균관의 배향과 교육 시설

성균관은 성현을 배향하고 학생을 교육하는 두 가지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성균관의 건물 배치는 크게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봉안해 둔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문묘와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명륜당과 기숙사 시설이 있는 학사(學舍)로 나눌 수 있다.

<문묘향사도(文廟享祀圖)>   
18세기에 성균관의 대성전과 동·서무에 모신 공자를 비롯한 유학 선현들 위패의 배치를 그린 그림이다.

성균관에서 문묘와 관련된 시설은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西廡), 제기고(祭器庫), 신삼문(神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은 문묘뿐 아니라 성균관 전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대성전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4성(四聖,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자 문하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 10명인 십철(十哲) 그리고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정몽주(鄭夢周)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대성전의 양쪽 아래에 동무와 서무가 있었다. 동무에는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 선현 가운데 58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서무에는 54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도 성현을 제향(祭享)하기 위한 문묘를 따로 설치하였다. 고려시대 국자감에는 배향을 위한 공간이 교육 공간과 함께 있어 제향 기능이 약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배향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조선이 유교적 의례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확산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균관 대성전>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성균관 전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그 밖에 문묘에는 제례(祭禮)에 쓰이는 물건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있었으며, 제례 때 분향하는 향관(享官)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한 향관청(享官廳), 문묘를 지키는 성균관 소속 노비들의 숙소인 수복청(守僕廳)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성전 남쪽 입구에는 성현의 혼이 출입하기 위한 신삼문이 있었다. 문묘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삭망제(朔望祭)를 지냈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공부하기 위한 시설은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비천당, 존경각 등이 있었다. 명륜당은 교관이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하고 시험을 보기도 하는 교육 활동의 중심 장소였다. 명륜당은 ‘인 간의 도리를 밝게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 「등문공(縢文公)」 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중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하는 일이 많았다. 명륜당의 현판은 1606년(선조 39)에 성균관의 명륜당을 복구하면서 주지번(朱之蕃)이라는 당대 명나라 명필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에게 글을 받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명륜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모두 여기에 기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유생이 모두 기숙하기에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의 수가 늘었을 때는 주변의 반촌(泮村)에 기숙하거나 때로는 향관청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존경각은 유생들에게 필요한 책을 보관하고 빌려주는 도서관이었다.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귀한 책을 가져오면 그것을 베껴서 성균관에 내려 주거나, 책을 찍었을 때는 성균관에 우선 주도록 하여 책이 부족하지 않게 배려하였다. 존경각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경전(經傳)과 역사서, 고문(古文) 등 약 1만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학과 관계가 없는 책은 유생들에게 읽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존경각에 두지도 못하게 하였다.

비천당은 현종 때 불교 사원을 헐어 그 자재로 명륜당 서쪽에 세운 건물이다. 그래서 비천당은 불교를 배척하는 상징적 건물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는 뜻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비천당은 생원·진사 시험을 볼 때 응시자가 많으면 명륜당과 함께 시험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 밖의 건물로는 육일각(六一閣)이 있었는데 대사례(大射禮)를 행할 때 사용하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육일각이란 명칭은 활쏘기가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는 유학에서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 가지 기본 소양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로 정한 것이었다.

또한, 유생의 학업을 관리하는 관원의 사무실인 정록청(正錄廳)이 있었다. 정록청에는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을 두어 과거 시험, 유생의 입학시험, 유생의 생활 관리 등을 비롯해 교관의 인사 등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유생들의 식당이 있었고, 유생들에게 필요한 재정을 관리하는 양현고(養賢庫) 등의 시설도 있었다.

태종 때에 변계량이 지은 문묘 비문에는 성균관이 96칸이라고 하였으나, 후대에 여러 건물이 추가되었으므로 훨씬 더 큰 규모였을 것이다. 이는 성균관 유생 수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건물로 조선의 지배 세력이 성균관을 통해 풍속의 교화와 인재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필자]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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