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별 교육 과정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 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유생들은 과거 합격에 필요한 공부를 하여야 하고, 성균관의 교육 과정도 과거에 필요한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문관 관료를 뽑는 문과는 주로 강경과 제술을 시험하였으므로 성균관의 교육 과정도 사서오경 중심의 경학과 사장학 그리고 사학(史學)으로 되어 있었다.
경학 교육은 1466년(세조 12)에 사서와 오경을 9단계로 나누어 교육하는 ‘구재법(九齋法)’을 만들어 학생의 수준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한 학생은 가장 먼저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태학지』 학령(學令)에는 『대학』을 공부하는 기간을 1개월 정도로 정하고 있다.89) 대학재에서 하는 공부를 마치면 성균관, 예문관(藝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관리 각각 1명과 예조의 관리 2명이 성균관에 모여서 경전 가운데 세 곳의 글을 읽게 하여 구두(句讀)가 정확하고, 경전의 뜻과 의미를 잘 이해하는지 시험하였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다음 단계인 논어재(論語齋)로 한 단계 올라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재를 같은 과정으로 통과하면 『맹자』, 『중용(中庸)』을 공부하고, 그다음에 오경(五經)을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주역(周易)』의 순서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주역재(周易齋)까지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면 과거 식년시의 회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각각의 단계를 마칠 때마다 시험을 실시한 것은 아니고, 1년에 두 번 봄가을에 실시하였다. 한 번 시험을 치를 때 몇 가지 경전을 응시하여 한 번에 여러 단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었지만, 경전을 공부하는 순서는 지켜야 하였다.
구재법에 따라 사서오경을 공부하는 순서는 주자(朱子)의 독서법을 따른 것이었다.90) 주자는 『대학』을 공부하여 학문의 규모를 정하고, 『논어』에서 근본을 세우고, 『맹자』에서 그 발전을 터득하고 난 뒤에 『중용』에서 옛 성인의 기묘한 사상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경(五經)의 ‘경(經)’이란 본래 ‘직물의 세로로 놓인 실’이란 뜻으로 사물의 줄거리를 말하며,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오경은 각각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경』은 정서적 인간 교육, 『서경』은 정치 교육, 『춘추』는 역사 교육, 『예기』는 제도·사상·풍속 등을 망라한 문화 교육, 『주역』은 인성과 우주 생성 원리의 교육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구재에서 오경을 『시경』, 『서경』, 『춘추』, 『예기』, 『주역』의 순서로 공부하는 것은 정서적 인간 교육, 정치 교육, 역사 교육, 문화 교육, 인성과 우주 생성 원리의 교육이라는 순서에 따르게 한 것이다.
성균관에서의 경학 교육은 사서오경을 단순히 읽고 암기하여 뜻을 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도록 하였다. 즉, “독서할 때에 의리(義理)를 밝히고 통달하여 변화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하며 헛되이 장구(章句)만을 힘쓰거나 문의(文意)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유생들이 경전을 읽고 그 의리를 밝힌다는 것은 단지 지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고 철학적 깨달음과 도덕적 실천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경전을 공부하는 기간은 『대학』이 1개월, 『논어』와 『맹자』가 각 4개월, 『중용』이 2개월, 『시경』, 『서경』, 『춘추』는 각 6개월, 『예기』와 『주역』은 각 7개월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사서오경을 모두 공부하려면 3년 7개월이 걸렸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모든 학생이 같은 시간에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균관에서는 철저히 개인별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학습 능력에 따라 기간이 짧아지기도 하고 늦어지기도 하였다. 즉, 구재법에 따 른 경학 교육은 능력별, 수준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균관 학생들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경학뿐 아니라 제술을 공부해야 하였다. 제술은 글을 짓는 것으로 시(詩), 부(賦), 송(頌), 기(記), 책(策), 문(問), 의(義), 의(疑) 등 여러 형식이 있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은 공부하는 근본은 경학에 있고, 제술은 경학을 공부하는 것을 돕는 것이라 하여 제술보다는 경학을 중요하게 여겼다. 1413년(태종 13)에는 대사성 권우(權遇)의 건의에 따라 성균관에서는 매달 30일 가운데 20일은 경학을, 10일은 제술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술은 외교 문서를 작성하거나 관료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때 반드시 필요한 실용적 분야였기 때문에 과거 시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균관에서는 늘 경학과 제술을 함께 공부하였다.
『태학지』 학령에 따르면 성균관에서는 한 달에 세 차례 제술을 공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91)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달 초순에는 의(義)와 의(疑)를 짓고, 중순에는 부(賦)·표(表)·송(頌)을 지으며, 종순에는 대책(對策)과 기(記)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제술을 할 때에는 문체를 간결하고 문장의 뜻이 잘 통하게 지어야 하며, 기괴한 글을 짓거나 통용되는 문체(時體)를 변경하지 못하게 하였다. 학생은 교관이 출제한 문제에 대해 깨끗한 글씨로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교관은 그것을 거두어서 읽고 채점하여 등급을 매겼다. 또한, 단종 때부터 교관은 모범 답안을 만들어 제술을 한 다음날에는 강의를 중지하고 유생들이 작성한 답안지를 개별적으로 지도하여 주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한 달에 3∼4편 정도의 글을 지었다. 이들은 제술을 위하여 성균관 서적 외에 선배들이 지은 초집(抄集, 잘 지은 문장을 모아 놓은 책)을 보기도 하고, 중국의 과거 시험 모범 답안을 모은 『삼장문선(三場文選)』을 입수하여 보기도 하였다.
사학(史學)은 경학이나 제술과 더불어 학생들의 사회적 안목과 역사 의식을 키워 주기 위한 중요한 교육 과정이었다. 그리고 유생들은 사학을 공 부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과거의 제술 시험을 치르기 위한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사학의 교재로는 『사기(史記)』, 『통감강목(通鑑綱目)』, 『송원절요(宋元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