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1. 성균관학생의 학습 활동

제술·경학 논쟁

성균관의 교육 과정은 과거 시험의 내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과거 시험을 강경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제술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 유생들의 학습 방법도 크게 달라졌다. 강경은 경서(經書)의 큰 뜻을 묻는 것으로 구술시험이었다. 강경을 시험하는 방법에는 본문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背講), 본문을 보지 않고 외우는 배송(背誦), 본문을 보고 물음에 답하는 임문고강(臨文考講)이 있었다. 배송이나 배강은 경서의 대문(大文)의 첫 글자만 적어 놓은 대나무 가지를 대나무 통 속에서 뽑아 거기에 해당하는 글을 외우거나 물음에 답하게 하였으며, 임문고강은 본문의 앞뒤를 가리고 중간만 보여 주면서 문답하게 하기도 하였다.

제술은 경서의 본문을 떼어 놓고 경서에 해석을 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세워 글을 짓는 것이다. 제술을 시험할 때는 사서와 오경 가운데 더 자신 있는 문제를 상편(上篇)으로 먼저 작성하고, 다른 것은 하편(下篇)으로 작성하였다. 상·하편을 모두 작성하는 것을 성편(成篇)이라 하였고, 둘 중 하나라도 작성하지 못하면 실격하였다. 문과 시험은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으로 세 차례 치렀는데, 중장에는 시(詩)·부(賦)·표(表) 등의 문예를 시험하였고, 종장에는 시무책을 시험하였다. 하지만 문과 시험 초장의 시험 방법만은 제술로 할 수도 있었고 강경으로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문과 시험의 초장에 어떤 시험 방법을 택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논란은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 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강경이 선택되면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경학이 강조되고, 제술이 선택되면 글짓기 공부에 시간을 더 많이 들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초에는 문과 시험 초장에 강경을 실시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의 정치·사회적 타락을 비판하면서 경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내용을 윤리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과거를 통해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내면화한 관리를 선발하기 위하여 제술보다는 강경을 실시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의 주장에 따라 1395년(태조 4)에는 과거 시험 초장에 강경을 실시하였으며, 문과 초장 강경법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규정되었다.

그러나 태종 때에 권근(權近)은 『권학사목(勸學事目)』에서 제술이 외교 문서를 작성하고,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글을 짓는 등 현실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들어 과거 시험 초장에 제술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1414년(태종 14)에는 제술을 시험하는 백일장이 따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과거 시험에서 제술이 중요해지자 유생들은 경학을 소홀히 하고 잘 지은 글만을 모아 놓은 초집(抄集)을 모범 답안으로 삼아 외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와 같이 문과 초장 시험 과목으로 강경과 제술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를 두고 여러 차례 대립하다가 세종 때에 와서 더욱 격화되었다. 1428년(세종 10)에 6품 이상의 경관(京官)을 궁중에 소집하여 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때 논의된 양측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92)

제술을 강조하는 측은 강경에 치중할 경우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는데, 우선 문장을 잘 짓는 자가 줄어들어 외교 문서를 작성하거나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시와 문장으로 응답할 사람이 없어 국익에 손상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강경은 시험을 치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농사 시기를 놓치기 쉽고, 시험관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공무 집행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고 하였다. 특히, 강경은 시험관 앞에서 얼굴을 마 주하고 시험을 보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따라 채점하게 되어 공정하지 못한 결과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공부 방법에서도 어려서는 옛글을 암송하고, 커서는 제술을 배우며, 늙어서는 저술을 한다는 선비 교육의 절차에도 어긋난다고 하였다.

반면에 강경을 강조하는 측은 제술이 과거 시험의 중심 과목이 되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경서는 읽지 않고 모범 답안인 초집만을 외워서 시험에 합격하려는 요행을 노린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근본은 경학인데도 유생들이 시문(詩文)에만 관심을 두어 학문의 깊이가 얕아졌다는 것이다. 경서를 공부하는 것은 실천을 위한 것인데 제술을 강조하게 되면 실천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 장차 교화를 일으키는 폐해가 생기게 되니 강경을 강조하여 실천의 근거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문과 초장 시험에서 제술을 실시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 과거 시험 절차의 번거로움 등 현실적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강경을 실시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유학의 근본인 경서를 학습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교육적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강경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균관의 기능을 학문의 수양에 둔 학자적 관료였고, 제술을 강조한 사람들은 성균관의 기능을 관리 양성에 중점을 둔 정치적 관료라는 차이점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란이 거듭되자 강경과 제술을 교대로 시행하려는 절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으며, 문과 초장의 고시 방법을 제술로 하고 성균관에서는 구재법을 실시하여 경학 실력을 향상시키자는 방안도 제시되었다. 결국 문과 초장의 시험 방법은 여러 차례 변하다가 성종 때 『경국대전』에 문과 초시의 초장에는 제술, 복시의 초장에는 강경으로 하는 규정이 결정되었다.

문과 초장의 과목을 두고 오랫동안 논의가 계속된 것은 과거 시험이 성균관의 교육 과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성균관 교육 과정은 유생들의 공부 방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생들의 학문적 성향 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성균관 교육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이승준
92)『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4월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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