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1. 성균관학생의 학습 활동

고사 평가

유생들의 학습에 대한 평가는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데, 매일 평가하는 ‘일고(日考)’, 10일마다 평가하는 ‘순고(旬考)’, 월말에 평가하는 ‘월고(月考)’, 봄과 가을에 평가하는 ‘연고(年考)’ 네 가지가 있었다.

일고는 모든 유생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상재와 하재의 유생을 한 사람씩 뽑아서 그날 배운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순고는 열흘마다 제술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즉, 10일 중에서 8일은 경학을 공부하고, 2일은 제술을 시험하였다. 이틀 가운데 첫째 날에는 유생들이 교관이 제시한 문제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였고, 둘째 날에는 교관이 모범 답안을 만들어서 유생들을 교육하였다. 일고와 순고는 성균관의 교관들이 유생을 평가하는 것으로, 평가 결과를 기록한 후 예조에 보고하여 과거 시험에 참고하였다. 월고는 예조의 당상관(堂上官)이 매달 1회 유생들에게 경전을 읽고 뜻을 풀 이하게 하여 성적의 순위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유생들에 대한 평가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연고였다. 연고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실시하였으며, 사고가 있을 때에는 시험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의정부, 6조, 사헌부, 사간원 등의 당상관이 시험관이 되어 유생들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글을 짓게 하는 제술 시험을 보았다. 시험 결과 성적이 우수한 유생 3명에게는 문과 초시를 거치지 않고 회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시험관을 여러 명 두는 것은 채점을 공정하게 하고, 시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평가 방법은 크게 강경과 제술 두 가지였다. 즉, 일고와 월고는 강경이었고, 순고와 연고는 제술 시험이었다. 강경은 경전의 본문을 읽고 뜻을 풀이한 후 중요하거나 논란이 되는 내용을 몇 가지 질문하여 평가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평가 결과를 통, 약통, 조통 세 등급으로 나누어 채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두(句讀)가 정확하고 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여 꿰뚫었으며, 질문에 대하여 의미를 정확히 분별하여 이야기할 수 있으면 ‘통(通)’이라 하였다. 구두와 뜻풀이가 정확하고 큰 뜻은 이해하였지만 그것을 응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면 ‘약통(略通)’이라 하였다. 그리고 구두와 뜻풀이는 정확하지만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조통(粗通)’이라 하였다. 또한, 『학령』에 따르면 여러 경서의 내용을 잘 알고 서로 연관 지어 응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대통(大通)’의 등급을 주기도 하였다. 즉, 강경은 단순히 내용을 암기하는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이해하는지와 그것을 나름대로 응용할 수 있는지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얻은 등급을 푼수(分數)로 환산하였는데, 대통은 3.5푼(分), 통은 2푼, 약통은 1.5푼, 조통은 5리(里)를 주었다. 사서오경의 아홉 가지 경전을 이와 같은 점수로 환산하여 채점한 후에 그것을 과거 시험에 참고하였다.

제술 시험은 사서와 오경에서 한 문제씩 출제하여 글을 짓게 하는데, 유생들은 두 문제 가운데 자신 있는 문제를 먼저 선택하여 답안을 작성하고, 다음에 나머지 문제의 답안을 작성하였다. 먼저 작성한 답안을 상편이라고 하고 나중에 작성한 답안을 하편이라고 하였다. 상편과 하편을 모두 작성하는 것을 성편(成篇)이라 하고, 성편을 하지 못하면 불합격하여 점수를 얻을 수 없었다. 제술은 문장의 형식을 잘 따르는 것과 글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평가하였다. 제술 점수는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상상’에는 9푼, ‘하하’에는 1푼을 주었다. 성적이 특별히 뛰어난 유생에게는 ‘거수자(居首者)’라 하여 10푼을 주기도 하였다.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학습한 내용에 대한 평가는 과거에 응시할 때 참고가 되기 때문에 유생끼리 경쟁도 치열하였다. 성종 때 성균관 유생들이 황필(黃㻶)이라는 생원이 성균관 안으로 상인을 불러들여 물건 값을 흥정하여 유생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을 문제 삼아 성균관에서 내쫓으려 한 사건이 있었다. 몇몇 유생들이 주도하여 이 일을 스승에게 고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 더구나 황필에 대한 상소가 올려진 뒤에 성균관 벽에 “황필을 비난하는 자는 허리를 베어야 마땅하다.”는 익명의 방이 붙고, 목이 베인 지푸라기 인형의 몸통에 “너의 머리는 어디에 있느냐? 날카로운 칼날의 번쩍이는 빛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는 글이 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조정의 여론은 황필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과 큰일이 아닌데도 스승에게 알리지 않고 왕에게 상소를 하였기 때문에 유생들의 죄가 크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결국에는 황필을 시기하는 무리가 모함을 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황필은 글을 잘 짓고,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에 올랐으며, 유생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사람과 계를 만들어 어울렸다. 여기에 끼지 못한 유생이 황필의 재능을 시기하여 근거 없는 비방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97) 이로써 성균관 유생들끼리 경쟁이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이승준
97)『성종실록』 권261, 성종 23년 1월 경인.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