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 평가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학(私學)보다는 관학(官學)을 진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은 성리학 이념에 기반을 둔 백성의 교화와 인재 양성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장 중점을 두어 육성한 교육 기관이었다. 따라서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려고 공부하는 생원과 진사는 모두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생원과 진사, 그 밖의 유생들은 다양한 과거 응시 기회 제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 혜를 받았다. 하지만 성균관에 입학하는 유생들은 모두 숙식을 같이해야 하며, 학습 부담도 많았고, 평가를 여러 번 거쳐야 했다. 또한, 과거 제도가 자주 바뀌면서 성균관의 교육 과정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성균관 유생들의 과거 합격률이 낮아졌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성균관에서 공부해야 할 생원과 진사들이 입학을 꺼려 하였으며, 입학한 후에도 성균관에 출석하지 않는 유생들이 많았다.
성균관의 교육을 활성화하고 유생들의 출석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원점 제도(圓點制度)’였다. 원점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신료들은 “성균관은 작은 조정이기 때문에 모든 선비들이 관학을 나와야 자신의 재능을 성취할 수 있고, 학문뿐만 아니라 스승과 벗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학문을 갈고닦을 수 있기 때문에 원점이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원점 제도는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이 일정한 원점을 취득해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원점은 출석 점수와 같은 것으로, 성균관의 식당에 비치된 도기에 관생들이 아침과 저녁 식사 때 반드시 서명해야 원점 1점을 주었다.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 즉, 성균관에 300일 거관(居館)한 사람만이 식년 문과 초시인 관시(館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성균관의 출석 제도를 과거 제도와 연계시킨 것은 관생들의 현실적 목표인 과거와 연계하는 것이 관생들의 출석을 장려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건국 초에는 성균관에 있는 유생들만 응시할 수 있는 관시에는 원점 300점을 받아야 응시할 수 있었고, 향시에는 200점 이상이 되어야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1417년(태종 17)에 제정된 과거법에서는 향시에도 원점 300점이 되어야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또한 회시(會試)에서 점수가 같을 때에는 원점이 많은 자를 뽑았다. 하지만 원점 300점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지적과 성균관에서 공부하지 않지만 학식이 뛰어난 인재를 차별 없이 선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어 과거에 원점을 적용하는 규정이 여러 번 바 뀌었다. 원점 300점을 받아야 응시할 수 있었던 관시에도 1471년(성종 2)에는 150점이면 되기도 하였고, 1485년(성종 16)에는 다시 300점으로 되었다. 그 뒤 『경국대전』에는 관시에 응시할 수 있는 조건만 원점 300점으로 법제화하였고, 향시·한성시의 원점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았다.94)
일정한 원점을 채워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원점 제도에도 예외가 있었다. 3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시 다음 해에 부모상을 당한 경우와 70세 이상 노부모의 병으로 원점을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원점에 관계없이 수령과 관찰사가 발급한 진성(陳省, 결석 사유서)을 발급 받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점 300점은 채우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1421년(세종 3) 변계량이 올린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성균관의 학생들이 여러 번 부종병(浮腫病)으로 죽게 되어 신 등이 까닭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생원들이 전부 원점 300점을 채우기 위하여, 또는 고강(考講)하는 법이 한자리에 오래 앉아서 글 읽기만 힘쓰므로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떨어져서 병이 깊어 감을 알지 못하였다가 죽기에 이른다.’ 합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원점이나 고강 두 가지 일은 나라에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게 하려는 것이며, 인재를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니 개혁할 수는 없으므로, 의원 두 명을 두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게 하여 치료하면 부종병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95)
성균관 유생 중에서 원점 300점을 채우려고 성균관에 오랫동안 기숙하다가 부종병으로 죽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 것이다.
원점을 채우기 어렵기 때문에 규정을 어기고 과거에 응시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부모의 상이나 노부모의 병 때문에 원점을 채우지 못하였다고 거짓 증명서를 발급 받아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수령과 관찰사가 증명서를 발급할 때는 어버이가 늙었는지 젊었는지, 오래된 병이 있는지 관리에게 보증을 서도록 하고, 청탁을 받고 거짓으로 증명서를 발급한 관리는 파면하게 하였다. 또한, 거짓 증명서를 발급 받은 사람은 식년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한 번 정지시키고, 과거에 합격한 경우에는 합격을 취소하였다.
성균관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대리 서명하게 하여 원점 300점을 획득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사례도 자주 있었다. 대리 서명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1487년(성종 18)부터는 생원 진사가 직접 도기에 서명하는 것을 폐지하고, 아침저녁 식사 때 성균관 관원 1명과 양현고 관원이 함께 유생들을 점검하여 도기에 적어 넣고 그 수를 확인하여 봉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월말이 되면 대사성이 장무관(掌務官)과 함께 직접 명부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어 과거에 응시할 때 참고하게 하였다. 아울러 원점을 대리 서명시킨 자와 대리 서명한 자 모두에게 식년 과거를 한 번 못 보게 하였다.
하지만 원점을 위조하는 사례는 없어지지 않았다. 중종 때에는 향시, 한성시가 가까워지면서 원점이 부족한 유생들이 대사성이 소장하고 있는 원점 장부를 훔쳐 -로 표기된 원점을 +로, +는 ++로 위조하여 원점의 점수를 높여서 과거에 응시하려 한 사례가 발각되었다. 이때 중종은 유생들이 성균관에 거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잘못도 있지만 대사성이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대사성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원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 사례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까지 여전히 유생들이 출석을 자율적으로 관리하였음을 영조 때 윤기(尹愭)라는 유생이 성균관의 생활을 기록한 『반중잡영(泮中雜詠)』의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도기책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표를 만들어서 칸에 각각 한 사람씩 자기 이름을 쓰고 수결(手決)을 한다. 모든 유생이 기록을 마치면 하색장(下色長)이나 조사(朝士)가 그 끝에 몇 명이 왔는지 기록한다.96)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서 원점 제도를 두었지만 유생들이 성균관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관학을 통해 교육을 진흥시키려 노력한 왕들은 수시로 성균관에 관리를 보내어 도기를 가져다 확인하고, 실제 거관하고 있는 유생의 수를 점검하였다. 하지만 성균관에 거관하고 있는 유생의 수가 성균관의 정원인 200명을 채운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원점의 적용을 받는 과거 시험은 주로 관시에만 한정되었고, 향시나 한성시는 수시로 원점 적용 점수가 바뀌었으며, 별시에는 적용되는 원점이 아주 낮거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생원·진사들이 굳이 성균관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었기 때문에 원점 제도를 통한 성균관 교육의 활성화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