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참여 행동
성균관 유생들은 자치 조직인 재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즉, 학생 신분이던 성균관 유생들이 여론을 모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하여 활용한 방법이 ‘유소(儒疏)’, ‘권당’, ‘공관(空館)’이었다. 유소는 여러 유생의 의견을 모아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것이고, 권당이나 공관은 유소에 대한 국왕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그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시위였다. 권당은 유생들이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으며, 공관은 성균관을 비우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유소를 실행하는 과정은 성균관 유생 윤기가 쓴 『반중잡영』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101)
성균관 유생들은 유교의 이념에 어긋나는 일이나 반역이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을 때 유소를 올린다고 하였다. 유소를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재회를 소집하여 유생들의 의견을 모으고, 의견 차이가 있으면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유생들의 의견이 모아졌는데 따르지 않거나 유소에 참여하지 않으면 재회를 통해 징계하였다. 유소를 올리기로 결정하면 유소의 대표자인 소두(疏頭)를 비롯하여 유소를 담당할 책임자를 몇 명 뽑았다. 소두의 책임 아래 유소를 작성하면 가장 먼저 소두가 서명을 하고, 유생들이 차례로 이름을 기재한 다음 유소를 밀봉하여 붉은 보자기로 쌌다.
성균관 유생들이 유소를 올릴 때에는 사학의 생도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향교의 교생들도 유소에 동조하는 뜻으로 그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명첩(名帖)을 보내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에 힘을 보탰다. 조선 중기 이후에 사림(士林)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소는 나라 전체 유생들의 여론까지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유소가 작성되면 그것을 국왕이 있는 궁궐까지 옮기는데, 소두는 유소를 넣은 함을 따라 길 가운데로 따라가며 재회의 임원이 그 뒤를 잇고 유생들은 동서로 나누어 길게 늘어서 나아갔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뿐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선비들의 여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도 함께 가져갔다. 유소를 옮기는 행진이 시작되면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길을 연다는 핑계로 인근 상인의 물건을 빼앗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유소의 행진이 있다는 소식이 있으면 상점이 문을 닫고 다투어 피하였다.
유소가 궁궐에 이르면 붉은 탁자 위에 유소를 넣은 함을 올려놓고, 탁자 아래에는 네 개의 청금록을 벌려 놓는다. 그 뒤 성균관의 수복(守僕)이 먼저 들어가 승정원(承政院)에 알린다. 유생들은 유소에 대한 국왕의 답변이 내려올 때까지 근처에 임시 천막을 만들어 식당을 옮겨 설치하고, 이곳에서 식당 도기에 서명을 하였다. 국왕의 답변이 내려오면 꿇어 엎드려 왕의 답변을 듣고,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성균관으로 돌아가 재회를 열어 유소를 다시 올릴 것인지 결정하였다. 유소를 몇 번 올려도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면, 그때에는 권당이나 공관을 하였다.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유소보다 더 강하게 유생들의 뜻을 관철하려 한 행동이다. 즉, 권당은 식당에 들어갈 때 받았던 출석 점수인 원점을 포기함으로써 국가의 정책에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 이는 것이다.
공관은 유생들이 성균관의 문묘나 신문(神門)에 절을 한 뒤 성균관을 떠나는 행동으로써 권당보다 항의의 강도를 더욱 높인 것이었다. 유생들이 일단 문묘에 절을 하고 떠나면 국왕이 다시 문묘에 들기를 권하지 않는 한 평생 성균관 문묘에 배향할 수 없었다.
학생 신분이던 성균관 유생들이 올리는 유소를 나라에서는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국왕을 비롯한 조정의 관료는 대부분 유소를 관대히 처리하였다. 그래서 유소를 올리는 유생들의 기개를 높이 여기고, 나라의 기둥이 될 선비들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우선 유생들이 공관을 하게 되면 성균관 대사성이 유생들을 명륜당으로 불러 연유를 물은 뒤에 간략하게 사유를 적은 초기(草記)를 국왕에게 올렸다. 국왕은 유생들에게 승지를 보내어 성균관에 들어올 것을 권하고, 유생들이 따르지 않으면 다시 예조 판서, 대신을 차례로 보내어 극진히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이와 같이 국왕이 정성을 보이면 유생들은 권당이나 공관을 풀고 성균관으로 들어왔다.
나라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이나 공관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균관에 문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묘는 예악과 교화의 근원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유교 정치 이념의 실현을 추구한 국왕과 조정의 관료로서는 성균관 문묘를 지키는 유생들이 문묘를 비우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 유생들의 유소, 권당, 공관이 잦아지고, 유소의 명분도 약해지면서 소두를 비롯하여 유소를 주도한 유생들을 강하게 처벌하기도 하였다.
101) | 윤기, 앞의 책, 168∼1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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