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의 교생 자치 조직

교임을 둘러싼 다툼

조선 후기 신분 제도가 변하면서 교임을 둘러싼 다툼도 많아졌다. 조선 후기 향촌에서는 전통적 양반 사족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양반 신분을 얻게 된 세력 사이에 향촌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났다. 이러한 다툼을 향전(鄕戰)이라고 한다. 1762년(영조 38)의 기록을 살펴보면 교임을 차지하기 위하여 향촌 세력끼리 다툼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홍봉한이 “향전의 폐단은 비단 서해(西海)만이 아니고 모든 도에 다 있습니다. 그 근본은 교임과 원임을 다투는 것입니다.”라 하였다.119)

교임 자리를 놓고 벌이는 향전은 양반 사족 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양반 사족과 신흥 양반 또는 서얼 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원이 발달하면서 향교의 교육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향교는 지방에 공자와 선현을 배향한 문묘를 갖추고 있는 유일한 관학으로서 향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원이 지나치게 많이 세워지고,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서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향교는 양반들의 집결소로서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1792년(정조 16)에 향교와 향임(鄕任)을 두고 평택 향교에서 구향(舊鄕)과 신향(新鄕)이 벌인 향전은 대표적인 사례이다.120)

이 사건은 신향인 권위(權瑋)가 이승훈(李承勳)이 평택 수령으로 3년 동 안 재임하면서 향교에 배례(拜禮)하지 않았다고 성균관에 고발하는 통문(通文)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성균관에서는 재임 유생들이 주동이 되어 천주교 신자로 의심을 받았던 이승훈을 청금록에서 지워 버렸다. 이에 이승훈의 동생이 조정에 탄원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어사를 평택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평소 구향과 신향 사이에 향임과 향교를 놓고 향전이 심하던 평택에 이승훈이 수령으로 부임한 후 신향을 배척하였고, 이에 앙심을 품은 신향이 그를 무고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전 수령을 모함한 혐의로 신향뿐 아니라 성균관 재임 유생들까지 처벌을 받았다.

교임 자리를 두고 벌이는 다툼은 향교를 이용하여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향이나 서얼들이 향교 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양반 유생들은 청금록을 폐기하고 사족으로만 교임을 지명하여 선발하기도 하였다. 1783년(정조 7)에는 예조에서 그 지역의 학식 있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택하여 향교의 도유사, 장의 등의 교임으로 뽑아 교육 책임을 맡기자고 하여, 교임에 대한 엄격한 선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예조에서 향교에 교임 선출에 관한 글을 내려 보냈다. 즉, ‘교임은 관(官)에서 반드시 오래된 집안과 이름 있는 문벌 가운데 경전에 힘쓰고 행실에 힘을 써서 온 고을에 명망을 받아 사장(師長)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직책을 맡길 것’을 지시하였다. 나라에서는 향교가 여전히 사족을 중심으로 운영되기를 바랐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후기에 향촌의 양반들은 향교의 교생이 되기는 기피하였지만, 여전히 교임을 맡으면서 향교를 통하여 향촌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이다.

[필자] 이승준
119)『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권141.
120)『정조실록』 권34, 정조 16년 2월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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