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배경
서원(書院)은 조선시대에 향교와 더불어 지방에 있는 양대 교육 기관의 하나였다. 관학(官學)이던 향교에 비하여 서원은 16세기 중반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先賢) 제사를 위하여 사림(士林)이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기구였다. 서원은 사우(祠宇)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서원은 학문 전수와 향사(享祀), 곧 제사 기능을 겸했고, 사우는 제사만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서원은 당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어 성행한 것은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학문을 갈고닦은 때부터였다.
조선에서 서원이 나타나게 된 것은 사림의 향촌 사회 세력 기반 구축 시도와 관련된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훈구(勳舊) 계열에 맞서 향촌 사회에서 사림의 구심체 역할을 하던 기존의 유향소(留鄕所)가 몇 차례 사화(士禍)를 거치며 제 할 일을 못하게 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하여 그동안 학문적 역량이 축적되고 수적 확대를 이룬 사림이 서원을 세운 것이었다. 서원은 교육과 교화를 표방하면서 사림의 향촌 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 성립·발전하였다. 서원이 출현한 또 다른 배경은 관학의 부진이었다. 당시 관학은 학문과 관계없이 관료 자제들이 출세하기 위하여 거치는 장소가 되었으며, 또한 교관 수준 문제로 비판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에 정치적 혼란 속에서 관리 진출을 기피하던 유학자들이 서원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서원은 둘 다 관학의 쇠퇴에 따라 발생하였고 교육 내용도 과거를 통한 사회 진출보다는 인격 연마와 수양을 중시하였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중국의 서원이 교육 기관의 성격이 강하였던 데 비하여 조선의 서원은 교육 기관으로서의 성격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사림 세력의 결집소 역할을 함께 하였다.
서원은 선현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하려는 ‘법성현(法聖賢)’에 일차 교육의 목표를 두었으며, 특히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을 탐구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이황(李滉)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 측면에서 교육 기관인 서원이 과거 준비를 외면할 수 없었으므로 관리 양성도 서원의 교육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말하자면 유교 진흥과 인재 양성, 선현 제사가 서원 설립의 주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