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서원의 성립과 사액
조선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은 고려 말 성리학 도입에 공헌한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하여 1542년(중종 37)에 사묘(祀廟)를 지었다. 지방 유학자들의 연구 풍토와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무엇보다 사림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옛 선현을 받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서원을 사묘 옆에 지어 지방 사림의 공부 장소로 삼았다. 백운동서원은 이처럼 관의 적극적인 관여와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그러나 향촌 사회에 서원을 본격적으로 정착·보급한 것은 이황이었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 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향촌 교화가 실효성 있게 진행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풍속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바르게 이끄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관학이 학교로서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고 인식한 이황은 참다운 성리학을 열 장소로서 서원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풍기 군수로 있던 1549년(명종 4)에 서원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현판을 내려줄 것(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면서 서원 보급에 주력하였다. 이에 명종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사서,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을 주었는데, 이것이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작이었다.
이황은 사액을 요청하면서 감사와 수령이 서원의 경제적 지원에만 힘쓰고 학칙의 구속, 교과 내용, 서원 운영 등에는 간섭하지 않도록 요청하였다. 향교와 달리 향촌 사림들이 자치적으로 서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이는 서원을 관학처럼 과거 준비 장소로서가 아니라 성리학을 연구하고 교육에 전념할 장소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또 이황은 서원의 외면적 확대뿐 아니라 내용 면에도 유의하여 교육 장소인 강당, 어진 인물을 제사 지내는 장소인 사묘를 구비한 서원 체제를 정식화하였다. 또한, 서원의 규칙인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의 학습 활동과 운영 방안을 규정하였는데, 이는 이후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