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의 융성과 폐단
서원은 지방 사림들의 자치 활동을 보장하는 향촌 기구였을 뿐 아니라 당시 정착되어 가는 성리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 시설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서원이 나타난 지 반세기가 지난 선조 때에는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이 세웠다. 지역별로도 초창기에 경상도 일변도였던 데서 벗어나 전라, 충청, 경기 지역에도 활발하게 건립하였고 한강 이북에도 보급되었다. 선조 때만 해도 60여 개가 넘는 서원이 설립되었다. 서원을 건립하여 선현의 행적을 닮아 보겠다는 사림의 요청을 나라에서 거절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서원은 날로 늘어 갔다. 서원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서원 보급 운동이 성공하고 사림의 향촌 활동이 자유로워진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名分論)이나 의리 중심으로 붕당 정치(朋黨政治)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각 당파의 세력 확장에 중심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숙종 때를 기점으로 서원은 지나치게 많이 설립되어 한 도에 80∼90개가 될 정도로 포화 상태가 되었다. 서원은 숫자상으로도 많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송시열(宋時烈)을 제사 지내는 서원이 전국에 44개에 이를 정도로 동일 인물에 대해 여러 곳에서 서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인물도 뛰어난 유학자여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당쟁 중에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에 있던 관리, 심지어 단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서원에 모셔지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되자 1703년(숙종 29)부터는 서원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하였고, 영조는 서원이 당론(黨論)의 근거지이며 선현 존경보다 유생들의 사사로운 이익과 관련이 있다며 서원 300여 개를 헐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조 이후 다시 확대되기 시작한 서원은 순조 때부터 갑자기 늘어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조치가 있을 때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서원, 사우를 마구 세우는 경향은 동족(同族) 마을을 기반으로 자기 가문의 이름난 선현을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이른바 ‘문중 서원(門中書院)’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전 시기의 서원은 대체로 향촌 공론(公論)을 바탕으로 건립하였고 학문을 우선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모신 인물의 후손이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문중 서원은 가문의 권위와 사적인 기득권 유지에 더 큰 관심을 두었으며, 당 연히 교육보다 제례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마구 세워진 서원에서 향촌 사회의 일반 백성 교화 기능을 점차 특권처럼 인식하여 폐단이 많이 생겼다. 서원의 대표적인 폐해로 지적된 것은, 향교 학생이 서원으로 옮겨 향교 쇠퇴의 원인이 된다, 공부하기보다는 모여서 놀고먹기를 일삼는다,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도피처가 된다, 백성을 착취하고 부려 먹는 경우가 있다, 서원 소유 면세 토지의 수익이 유생의 음식으로 낭비된다, 서원 유생이 당쟁에 가세한다 등이었다.
조선 후기 서원을 마구 세운 것은 서원의 질 저하를 불러와 서원의 사회적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고, 이는 곧바로 수령, 관속, 고을민의 외면과 침탈(侵奪)로 이어졌다. 서원은 점차 향촌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였으며, 양반 유림들에게도 서원은 이제 의지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실시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