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3. 서원서원의 역할과 기능

정치·사회적 기능

서원은 향촌 사림들의 공공 장소였다. 서원에는 언제나 사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유림 사회와 관련 있는 소식이 전달되고 여론이 형성되었다. 즉, 서원은 사림의 모임 장소이자 중앙 정파를 지지하는 여론 조성의 중심지였다.

<화양서원>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1704년(숙종 30)에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 지은 사당이다. 이 묘는 그 옆에 있던 화양서원과 함께 노론(老論)의 근거지로 폐단이 심했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 버렸으나 1874년(고종 11)에 다시 세웠다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향촌에 문제가 생겼거나 어떤 소식을 접하였을 때 유생들이 서원에 모여 결의하는 것을 유회(儒會)라고 하였다. 중앙 정치 현안과 관련된 여론을 수렴하여 소청(疏請)을 올리는 곳은 향교이지만, 처음 논의하고 의견이 수렴(收斂)되며 통문이 오고 가는 곳은 서원이었다. 유회를 열어 여기서 모은 의견이 통문 형식으로 작성되면 이 통문은 각 고을이나 향교, 서원 등에 발송되어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조정의 정치 문제부터 향촌 사회의 교화 문제까지 크고 작은 모든 사항에 대한 관심 표명과 여론 환기는 이런 절차를 거치게 된다. 효종 때 예송 논쟁(禮訟論爭)에서 영남 사족이 공론을 형성하고 집단 시위를 벌인 것도 서원을 통해서였다.

유회에서는 서원 전반의 운영 문제에 관한 의결뿐 아니라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하고 수렴하여 공식화하였다. 또한, 백성이 한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려 효자·열녀를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자를 바로잡아 향촌의 기풍을 잡기도 하였다. 하층민뿐 아니라 동등한 선비들 중에서도 죄가 있는 자를 규탄하고 성균관의 예를 본떠 발문을 써 붙이기도 하였으며, 노비를 시켜 북을 울리며 서원 밖으로 내모는 풍습도 있었다. 또한, 지방 풍속을 문란하게 한 사람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몰아내는 사적 제재 조치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처벌 조치가 가능하였던 것은 향촌에서 서원의 사회 교화 기능이 그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서원은 이러한 권위를 빙자하여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 약탈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서원의 인장에 먹을 묻혀 찍어 보내는 묵패(墨牌)가 동원되었는데, 이 중 가장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것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화양 묵패였다. 화양서원 세력은 당시 국가에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으며, 한번 묵패가 발행되면 설사 수령이라도 거절하지 못하였다. 묵패는 대개 서원의 제수와 비용을 충당한다는 핑계로 발행되는데, 일단 묵패를 받게 되면 논밭이라도 팔아 바쳐야 하였고, 어길 때에는 서원 뜰로 끌려가 감금당하거나 형벌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필자]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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