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접
거접은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을 일정 기간 서원에 기숙시키면서 독서와 제술 등을 교육하는 형태로서 거재(居齋)라고도 하는데, 향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행하는 형태이다. 거접 유생의 선발 기준은 확실하지 않으나, 서원에 공부하러 오는 순서대로 받아들였거나 백일장, 순제에서 높은 성적을 거둔 사람을 뽑았을 가능성이 있다.
거접 인원은 유생 참여와 서원 재정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다. 거접 인원은 총원이 아니라 거접 기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 인원이 10명인데 거접 기간이 한 달이고 보름마다 교체한다면, 처음에 10명이 들어와 거접을 마치고 나면 다음번에 다시 10명이 들어와 이어 가는 식이다. 중간에 결원이 생기면 대기하고 있던 유생을 불러 인원을 채우게 하였고, 재정에 여유가 있으면 정원을 넘어도 받아 주었다.
거접 시기와 기간은 봄가을로 나누어 한 달이나 보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서원의 재정 형편에 따라 늘거나 줄 수도 있다. 유생들은 거접 기간에 독서와 제술을 하면서 과거를 준비하였으며, 관아에서 서책과 지필묵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서원에서는 음식과 잠자리를 유생들에게 제공하였으며, 같은 거접 유생이라도 과거 합격자를 더 우대하였다.
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지방관이나 향교에 파견된 교수 등이었다. 주세붕은 향교의 학교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본인도 자주 나와 교육을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서원이 과거 준비 장소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사림이 과거 시험에만 힘을 쏟는 경향을 경계하였고, 거접은 서원 설립의 본뜻이 아니니 중지할 것을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당부하기도 하였다.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거접을 부정하는 분위기 이외에 거접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재정 문제였다. 도산서원 같은 곳도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수입으로 한 해 서원 경비를 다 충당하지 못해서 부채(負債)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한정된 재원을 제례와 유림들의 모임에 쏟는 경향이 있어, “교육이 유지되지 못하고 모여서 독서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자주 나왔다.
조선 후기 서원들은 거접에 들어가는 재정 문제를 많이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곡서원(淵谷書院)에는 ‘여름 거접 때 식량할 쌀은 28말, 10명이 20일이고 매일 한 말 넉 되씩’ 소비된다고 계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른 서원들 또한 예전보다 거접 유생을 줄이거나 날짜를 줄이기도 하였으며, 유생들에게 먹을 식량을 가져오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