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회
강회는 일종의 특별 수업으로서 통독회(通讀會), 강학회(講學會), 독서 유회(讀書儒會)라고도 하였다. 주로 매달 삭망 분향제가 끝나고 나서 경전 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3∼5일 정도 진행하였으며, 참석 인원은 유생들만 수십 명에 달하였다. 또한, 강회를 진행하는 강장, 직월 등의 원임이 따로 지정되었다.
삭망 강회일이 다가오면 원임과 유생들은 강장(講長)을 위촉하고 고을의 양반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알린다. 분향이 끝나면 선현들의 위패를 강당에 모셔 놓고 뜰에 정렬하여 위패를 향하여 배례를 한다. 강당에 올라 좌우로 정렬하고 강장이 오르면 다시 배례를 한 후, 유생들은 서로 읍례(揖禮)를 한 다음 자리에 바로 앉는다. 강장이 경전 내용을 설명하고 유생 한 사람이 강의 내용을 적으며, 강의가 끝나면 유생을 한 사람씩 불러 강장과 원임 앞에서 읽은 책을 암송하거나 설명하도록 하고 평가를 하여 장부에 적어 놓는다.
성적이 나쁜 학생은 회초리를 때리거나 책임 추궁을 하고, 계속해서 성 적이 나쁘면 강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쫓아낸다. 질병으로 불참한 사람은 다음에 추가 강회 형식으로 학습 정도를 확인하며, 무단으로 여러 번 불참하는 유생은 강회에서 쫓아내고 유생 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못하게 조처한다. 강회 끝 무렵에는 강장이나 원임이 다음번 경전이나 분량을 정해 공부하여 오도록 당부하고 서로 읍례를 한 다음 헤어진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재정적인 이유로 강회가 점차 많아졌다. 강회는 짧은 기간에 많은 인원을 참여시킬 수 있고, 독서와 의리 탐구라는 명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있었던 정기적 강회 외에 사액이나 국가에서 책을 나누어 준 것 등을 기념하는 부정기적인 강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서원에 따라서는 강회를 위하여 따로 시설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강회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선비들을 먹이는 것이 가장 난처한 일이다. 지금 서원 노비의 말을 들으니 봄부터 수십 명의 선비들을 먹인다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냐.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서원의 힘이 넉넉하지 않은 일이다.129)
날을 잡아 설강하니 본 고을과 인근 고을의 선비들이 듣고 100여 명이 오니 함께 증자(曾子)의 말씀을 강론하였다. 사람은 많고 비용은 커서 겨우 하루 만에 끝내고 말았다. 자세히 변론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130)
이렇게 강회를 열었지만 재원 부족으로 짧게 하거나 중단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으며, 강회를 할 때 유생들에게 먹을 식량을 가져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원마다 교육 활동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별도 기금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며, 형편이 더 좋지 않으면 고을에 있는 서원이 돌아가면서 강회를 열기도 하였다. 재정 형편이 어려우면서도 서원들은 유생 교육과 더 나아가 정치적·학문적 영향력 확대, 유교 질서 확립 등을 위하여 강회 를 더욱 많이 개설하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