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통한 교육
서당에 다니는 아동들은 한참 놀기 좋아할 나이이므로 책을 읽어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 당연히 놀이도 이루어졌다. 적절한 놀이 활동은 여가를 즐기고 학습 의욕을 북돋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금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학습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특별한 아동용 장난감이나 놀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만큼, 대부분 학습과 관련된 놀이였고 성인용 놀이와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초·중·종 놀이, 화승작, 시백, 고을 모듬 놀이, 남승도 놀이, 승경도 놀이, 조조 잡기 등이 있다. 또한, 주로 명절에 하던 서당 학동들의 집단 놀이로 원놀이와 가마싸움 등이 전해진다.
초·중·종(初中終) 놀이는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접장이 시조의 초장 또는 중장·종장을 낭송하면 방바닥에 놓인 시조 모음 가운데서 맞는 짝을 가져가는 것으로, 먼저 일정한 시조가 다 맞추어지면 그 결과의 숫자에 따라 승부가 판가름 난다. 이 놀이를 하면서 학생들은 시조, 당률, 삼자시(三字詩) 등의 형식과 내용을 즐겁게 익힐 수 있었다.
화승작(火繩作)은 일정한 길이의 화승(줄)에 불을 붙여 놓고 그것이 다 타기 전에 글을 짓던 것으로, 시 빨리 짓기 놀이의 하나이다. 이는 놀이일 뿐 아니라 문학을 장려하는 일종의 교육이며, 넓은 의미로는 문화 행사였다. 여기서도 시를 평가하여 장원을 뽑고, 장원이 된 학생에게 장원례를 해주었다.
시백(詩伯)은 한시를 외우기 위하여 만든 놀이 기구이다. 나무나 상아로 된 가로 1.2㎝, 세로 1.5㎝의 직사각형 조각을 600개 만들어 오른쪽에는 붉은색, 왼쪽에는 검은색으로 한자를 새겼다. 검은색과 붉은색 글자가 가로 20개, 세로 15개로 각각 300개씩이다.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배운 뒤 유명한 한시(漢詩) 구절을 모아서 편집한 『추구(推句)』를 배우게 되면 한시 몇 백 구절을 외우게 되는데, 그런 뒤에 시백을 가지고 한시 구절을 맞추며 노는 것이다. 이것은 아동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고을 모둠 놀이는 정해진 책의 글자와 자기가 아는 다른 글자를 맞추어 두 자로 된 고을 이름을 짓던 놀이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어린이가 둘러앉아 각자 알고 있는 고을 이름을 모두 쓰고 책을 덮는데 가장 많이 쓴 사람이 유리하다. 그러나 글자가 틀리거나, 자신이 써낸 고을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상대가 물었을 때 틀리면 오히려 점수가 깎이므로, 반드시 많이 썼다고 해서 놀이에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는 놀이였다.
고을 모둠 놀이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주로 하는 것으로, 이 놀이를 통해 지리적 감각을 익힌 뒤에 본격적으로 남승도 놀이를 하게 된다. 남승도(覽勝圖) 놀이는 명승지를 유람하는 판을 놓고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유람을 다닌 다음 출발한 장소로 빨리 되돌아오기를 겨루는 놀이이다. 명승지의 내용이나 일정은 처음에 판을 만드는 사람이 적어 넣기에 따라 다르다. 놀이 인원이 많을 때에는 놀이에 흥미를 주기 위하여 유람객을 시인·한량·미인·승려·농부·어부의 여섯 부류로 나누어 명승지에 도착했을 때 적절한 특전을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진주 촉석루에 한량이 이르면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특권이 주어져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얻은 수를 쓰지 못하고 모두 한량에게 바쳐야 한다. 또한, 같은 고장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적용되는데, 예를 들면 미인이 먼저 가 있는 곳에 중이 가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승경도(昇卿圖) 또는 종정도(從政圖) 놀이는 조선시대에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 공부하려는 마음을 자극하고, 관직의 이름과 벼슬 승진에 관한 지식을 익히게 하려는 놀이였다. 조선시대 관직은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 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따라서 양반집에서는 자제들에게 관직에 대한 체계적인 관념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이 놀이는 종이에 관직도(官職圖)를 그려 놓고 윷이나 주사위를 던져 숫자에 따라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승진이 순조롭게 되면 벼슬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파직이 되어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사약까지 받을 수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둥글게 앉아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曹操)를 찾아내어 벌을 주는 조조 잡기라는 놀이도 있었다. 이 놀이의 이름이 조조 잡기인 이유는 조조가 정권을 탈취한 나쁜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역할 놀이에 해당되며 5∼6명 정도 인원이면 할 수 있었고, 비슷한 놀이로 포수놀이, 도둑잡기 놀이가 있었다. 놀이 방법은 먼저 종이쪽지에 인원수대로 『삼국지』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인 조조, 유비, 조자룡, 관우, 장비, 제갈공명을 적어 하나씩 뽑아서 역할을 맡는다. 유비라고 적힌 쪽지를 가진 사람이 명령관이 되어 부하 장수 한 사람에게 명령한다. 예를 들면 “조자룡아, 너는 빨리 간사한 도적 조조를 붙잡아 오너라.”라고 말한다. 그러면 조자룡 쪽지를 가진 사람이 일어나서 유비 이외의 사람을 훑어본 후에 조조로 짐작되는 사람을 붙잡아 내어 맞았으면 붙잡힌 사람이, 틀렸으면 맞히지 못한 사람이 벌칙을 받는다.
원 놀이는 경북 지방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서당 놀이로서, 정월 초 서당 훈장이 명절을 쇠러 고향에 돌아가 글공부를 쉬게 되는 때에 하였다. 음력 정월 초에 세배가 끝나고 한가해진 학생들이 접장이나 똑똑한 학생을 원님과 육방 관속(六房官屬)으로 분장시켜 마치 원님이 행차하는 것처럼 차리고 마을 안을 돌아 행차한다. 그러다가 넓은 마당이나 부잣집 사랑방에 자리를 정하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송사(訟事)를 판결하거나, 모의 과거를 실시하고, 운을 내어 문장력을 시험하기도 한 놀이이다. 원래는 사사로운 작은 일을 공평하게 시비를 가리는 데서 차츰 사회 문제까지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두 서당의 학생들이 대립해서 원 놀이를 하다가 문장력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훈장을 납치해 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훈장은 창피해서 그만두고 돌아가 서당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있었다.
가마 싸움 또는 가마 놀이는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가마를 가지고 두 패로 나누어 겨루던 놀이로, 8월 추석이 되면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접장의 지휘 아래 행하였다. 지금의 기마전과 유사한 편싸움으로 상대편의 기수를 가마에서 떨어뜨려 전멸시키는 편이 이긴다. 경북 의성 지방의 가마 싸움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특히 유명하다. 서당의 학생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상대방의 가마를 먼저 밟아 부수는 쪽이 이긴다. 학문을 닦는 서당 학생들의 놀이이면서도 편을 나누어 가마를 만들고 깃발을 꽂는 것, 진을 치는 것 등이 전투적인 색채가 짙어 무예의 기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