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의 운영
서당은 방 한 칸과 훈장만 있으면 운영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기본 시설이 필요 없었다. 서당의 규모는 학생 수에 따라 1칸 규모에서 4칸 규모가 되기도 하였다. 서당은 운영자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교육 수준뿐 아니라 교육 환경까지 차이가 많았다. 평민은 마을 유지의 사랑방 정도에서 공부하였으나, 유력한 문중 서당은 경치 좋은 곳에 서당을 짓고 학식 높고 이름난 문인들이 오가며 줄줄이 현판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양반집 자제들도 요즘 아이들처럼 장난기와 지루함이 있었는지 서당에 낙서가 남아 있기도 하다. 한 유력 가문의 문중 서당에는 “와서 노는 여러 수재들아! 벽에 낙서를 해서 서당을 더럽히지 마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그 주변에까지 낙서가 되어 있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서당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문중이나 마을에서는 서당계를 조직하거나 재산을 출자하여 공동 관리하였다. 계원들에게 기금을 갹출하고 이것을 관리하여 얻는 수입금으로 서당을 운영하자는 것이다. 일부 서당은 일정한 시기마다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기도 하였다.
여러 집안이 함께 출자를 한 서당을 운영할 때에는 당연히 서당 운영 규칙이 있었을 것이다. 은진 송씨 집안에는 17세기 이후 문중 서당의 명부와 정관을 기록한 『비래서당좌목(飛來書堂座目)』이 남아 있다.
『비래서당좌목』의 앞부분에는 학생의 명부가 적혀 있다. 명부에는 학생의 이름이 큰 글씨로 씌어 있고, 그 아래에 자와 태어난 해가 선배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뒷부분은 서당의 운영 세칙이 적힌 ‘서당 입의(書堂立議)’인데, 재산 운영 방법부터 교육과 운영 세칙에 이르는 항목이 밝혀져 있다. 다른 서당들도 이러한 형태의 규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당은 비록 특정한 규정이 없이 설립되는 사설 교육 기관이었지만, 교육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따라서 국가는 서당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장려하여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1632년(효종 10)에 송준길(宋浚吉)이 정한 서당 학규인데, 여기에는 수령이 직접 가서 학생을 시험하여 실효가 드러나면 훈장에게 조세를 면제하고 학생에게 상을 주도록 하는 적극적인 장려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