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항과 근대 교육관
100년 전 근대 교육의 수용과 전개는 국가 존립과 직결된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서양 열강과 일본의 외압과 침략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개항 이후 지속된 근대화 열풍에 민족·전통 문제는 고루(固陋)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개화국의 실현이 교육의 최대 목표였다. 문명화된 신민(臣民)은 국가의 대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들이 구상한 개화는 근대화라는 미명(美名)으로, 민족자존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되었다.
개항은 외압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 조선 정부는 외세의 접근에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많은 개화론자들은 조선을 자주독립, 부국강병의 당당한 국가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개혁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적 질서보다 큰 틀에서 당면한 문제에 대처하려는 방안이었다. 이 가운데 서양 세력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동도(東道)에 바탕을 둔 교육이 제기되었고,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개혁적 교육론을 제시하거나 수용하였다. 정부가 추구한 일련의 교육 정책은 갑오개혁(甲午改革) 때부터 현실화되었다.
개항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새로운 인력 양성은 필연적이었다. 정부에서는 각종 교육 기관을 설립하거나 지원하여 근대적 인력을 기르려 하였 다. 또한, 지방에도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정부는 동문학(同文學)과 육영공원(育英公院), 연무 공원(鍊武公院)을 설립하여 부국의 기틀을 마련하려 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원산 학사(元山學舍)를 설립하여 근대적 학문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이화학당(梨花學堂),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들 교육 기관은 갑오개혁 당시 국가의 교육 정책 수립에 기여하였다.
조선 사회는 후기에 들어와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와 함께 대외적으로 청나라는 1840년 이후 서양의 무력 침략에 직면하여 자존국(自尊國)으로서의 위상에 치명상을 입었고, 일본도 1850년대에 미국에 의해 개방된다. 조선에서는 개화와 통상을 주장하는 개화론자들이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세계정세와 주변국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정부는 주변 세력인 청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전통적 명분론(名分論)으로 공고히 하였고, 재야학자들이 ‘외양일체(倭洋一體)’를 주장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 오자,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한편, 개항 직후 조선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여 근대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구 열강에게 정치적·경제적으로 압도된 청나라는 조선에게 개항하여 열강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라고 종용하는 세력으로 변해 갔다. 구체적으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에 개국과 통상을 적극 권고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을 사전에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무비 강화(武備强化)를 위한 무기 제공과 기술자 교육 등을 주관함으로써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본과 열강의 위협에 조선이 대처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개국 통상에서 청나라의 무비자강책(武備自强策)을 수용하면서도, 통상에는 신축성을 보였다.134) 더욱이 조선 내부에서 가중되었던 개화 반대 상소와 개화 세력의 결집이 약한 상태에서 전향적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1880년대 들어와 조선 정부가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통상론이 공론화됨으로써 내적으로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의 사회적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특히, 1880년 제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金弘集)이 소개한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조선이 주변 정세에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러 방책을 담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대해야만 국제 관계에서 조선이 안정적 위치를 지킬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정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조선 정부는 근대 문물을 익히고 참고하기 위해 영선사(領選使)와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을 청나라와 일본에 각각 파견하여 부국강병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영선사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근대적 군사 기술과 무기 제조, 어학 습득에 치중하였고, 신사 유람단은 개혁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 시찰에 집중하였다.
한편, 개항을 전후해서 조선 사회는 내적으로 지배층의 분화가 예고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와 개화론이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면서 혼미한 정국 이 지속되었다. 온건론자들은 주로 조선의 정치·문화적 질서를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자는 절충적 개화론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였다.135) 이들은 정치적으로 청나라의 지배력을 인정하였기에 조선의 부국강병이나 자주독립은 청나라의 용인 아래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급진론자는 주로 일본의 근대화된 문화 발전 양상을 동경하면서,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부분까지도 개혁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당시 정부 개화 정책의 대세는 동도서기에 입각한 방안이었다. 동도서기론은 1880년대에 들어와 일부 재야 학자와 관료층을 중심으로 공론화되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교서(敎書)가 내려진 시기에 재야 학자들의 서구 문물 수용에 대한 이해의 폭은 한층 넓어지게 된다. 이 가운데 신기선(申箕善)은 동도와 서기의 구분을 전제하면서도, 서기 수용에 입각한 자강책(自强策)을 제시하였다.
대개 동양 사람들은 형이상(形而上)에 밝기 때문에 그 도(道)가 천하에 홀로 우뚝하나 서양 사람들은 형이하(形而下)에 밝기 때문에 그 기(器)는 천 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 동양의 도로써 서양의 기를 행한다면 지구의 오대주(五大洲)는 평정할 것도 못된다. 그런데 동양 사람은 서양의 기를 잘 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양의 도도 한갓 이름만 있고 실이 없어 쓰러질 형편이니, 이것이 날로 서양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면서도 방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진실로 우리의 도를 잘 시행한다면 서양의 기를 행하는 것은 매우 쉬울 것이니, 이처럼 도와 기는 서로 필요하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농정신편(農政新編)』, 「시강원문학동양신기선서(侍講院文學東陽申箕善序)」).
그 핵심은 동도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서기 수용이었다. 그리고 동도와 서기는 함께 움직이는 변수로, 조선은 서기를 수용함으로써 부강의 근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처럼 동도서기는 조선이 통상과 개국 정책을 추진하면서 마련한 구체적인 대안이었다. 동도서기에 입각한 개화 성향 지식인들의 상소가 계속되자, 고종은 1882년 12월에 교육을 장려하는 교서(敎書)를 공표하였다.
종래로 정사와 교화를 갱신하려면 먼저 기성 견해를 깨어 버려야 한다. …… 오늘 통상과 교섭을 하고 있는 이때에 관리나 천한 백성의 집을 막론하고 다 크게 물건을 교역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잘살게 하려는 것이다. 농공상매(農工商賈)의 아들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데 따라 다 같이 올라가게 한다. 오직 재간과 학문이 어떤가 하는 것만을 보고 출신의 귀천은 따지지 않는다.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녹봉만 허비하고 나라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들은 더구나 시세의 요구에 따라 분발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음으로써 하나의 길로 같이 나가는 정사를 이룩할 것이며 …….136)
이 교서는 곧 통상과 교역이 부국강병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민(民)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개화 정책에 지지를 받으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을 실시하여 실용적 신민을 양성하고, 이를 위해 신분제에 집착했던 전통적 교육관을 탈피·수정하려는 정책이었다. 물론 이 교서가 내려진 직후 교육 기관이 설립되거나 신분제의 차별적 잔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동도서기적 관점은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의 정치적 추세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동도서기를 추진할 수 있는 개화 세력의 분열상이 그것이다. 개화론자들은 개화의 필요성에는 인식을 같이했지만, 개화 정책의 추진과 세력 배경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영선사를 이끌었거나 청나라와 교섭을 주도한 인물들은 친청(親淸)으로, 일본의 문명 개화의 발전상을 목도한 개화파는 이른바 일당(日黨)으로 분열되었다. 온건론자인 김윤식(金允植)은 1881년 영선사를 이끌었던 인물로,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동도서기적 관점에서 근대 기술을 수용하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만일 서울과 지방의 학교에서 총명한 인재를 모아 교육하면, 점차 우수한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이니 수십 년의 공이 쌓여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인재, 덕을 갖춘 인재가 나와 나라에 쓰이는 도라면 걱정이 없다. …… 오호라, 유럽의 제국이 서해에서 웅장한 나라가 된 것은 학교가 있어 교육이 성한 데 있다.137)
그는 동도와 서기라는 관점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서양의 교(敎)는 배척의 대상으로, 서양의 기(器)로 인식된 농상(農商)·의약(醫藥)·갑병(甲兵)·주거(舟車)는 기술 문명의 상징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그는 학교를 인재가 충만한 곳으로 간주하였고, 서구 열강이 부강할 수 있던 근본적인 원인을 교육에서 찾았다. 김윤식은 학교 설립과 인재 양성을 국가 부흥의 근본으로 강조하였 지만, 총명한 인재를 덕(德)을 갖춘 인물로 보았고 선비(士)가 주요 교육 대상이라는 제한된 교육관을 보여 주었다.138)
온건론자인 어윤중(魚允中)은 원산 학사를 건립하는 데 참여할 정도로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물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원산 학사는 1883년 원산 관민이 공동으로 설립한 학교이다. 과정은 문반과 무반으로, 무반이 200명이나 될 정도로 군사 교육을 중시하였다.139) 당시 서북 경략사(西北經略使)였던 어윤중이 학사 설립을 지원한 것은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군사 교육에 비중을 많이 두었는데, 이는 당시 개화 정책이 강병(强兵)에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나아가 그는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청년들에게 유학의 기회를 부여하고, 서양의 군사 기술과 군제(軍制)를 습득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 동도서기관에 입각한 학자들은 이용후생에 필요한 서기의 수용과 교육을 통해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강화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김옥균(金玉均)은 일본의 지원으로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의 근대 개혁에 관심이 상당히 많았다. 그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학생을 일본에 많이 유학 보내 근대 문물과 군사 기술을 배우도록 독려하였고, 그 자신도 일본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주독립과 부강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는 정치·외교·군사 등 모든 부문에서 청나라의 속국화(屬國化) 정략과 정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내적으로 민지(民智)를 개발하기 위해 실업과 기술·군사 교육을 강조하였다.
김옥균은 61명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게 되었는데 …… 장차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기운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우리가 만일 졸업을 하고 우리나라에 돌아간다면 우리나라에도 군관 학교를 세워 우리나라의 간성(干城)이어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140)
오늘날 세계가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을 다투어 경쟁할 때를 맞아 양반을 없애고 그 폐원(弊源)을 끝까지 베어 내는 일에 힘쓰지 아니하면 국가의 패망을 기대할 뿐입니다. …… 문벌(門閥)을 폐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정하여 인민의 인용을 받고 널리 학교를 설하여 인지를 계발하고 외국의 종교를 유입하여 교화를 돕는 것도 또 하나의 방편입니다.141)
교육의 성공과 실패는 청년과 민에 대한 새로운 각성에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를 구하자면 민중을 교육하는 이외에는 타도(他道)가 없다고 …… 오직 청년에게 실올 같은 희망을 비끄러맸던 것이다.”라 하여, 민중 교육과 청년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의 교육론은 어리석은 민중이 변화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미 갑신정강(甲申政綱)에서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사람으로 관(官)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 사람을 택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하여,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청년 중심의 실업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하루속히 단행하여 강병을 이루고, 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할 때 중앙 집권의 기초가 성립된다고 전망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朴泳孝)는 정변 이전 개화파의 일원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진하였고, 강병을 위한 군사 훈련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888년 고종에게 올린 「건백서(建白書)」에 근대 개혁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구상이 드러나 있다.
정부로 하여금 인민을 교육시키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직분을 알고 이치를 깨달아 빈곤에 빠지지 않게 하고, 완악(頑惡)하고 흉포한 난동을 일으켜 인간의 보편적 의리(義理)를 해치고 죄악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 는 까닭입니다.142)
그는 교육의 기능을 개인과 국가적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즉, 교육은 개인의 행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토대이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는 근간이 된다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교육 세목으로 소·중·장학교 설립, 다양한 교과목 개설, 국사와 국어 교육, 외국어 교육을 제시하였다. 교육 내용은 실용성을 갖춘 ‘격물궁리학(格物窮理學)’으로 전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강병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병학교(兵學校)’를 설치하고, 유학까지도 제안하였다. 또한, “위로는 세자 전하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함으로써 천지의 무궁한 이치를 밝힐 것 같으면 문덕(文德)과 재예(才藝)가 다시 찬연해질 것”이라 하여 교화 대상을 국민으로 이해하였다.
유길준(兪吉濬)은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교육 개혁을 거론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에는 서구의 교육 정황을 토대로 하여, 교육의 목적과 기능, 내용 등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9편 「교육하는 제도」에서는 근대 교육의 필요성과 교육의 기능을 언급하였다. 그는 개화의 단계를 ‘미개화-반개화-개화’로 나누면서 교육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교육의 대법에 그 명목을 나누는 것이 가하니 그 첫째가 도덕의 교육이며, 둘째가 재예(才藝)의 교육이며, 셋째가 공업의 교육이다. 도덕은 사람의 마음을 교도하여 윤리의 기강을 세우며 언행의 절조를 타이르니 인세(人世)의 교제를 관제하는 것인즉 그 교육의 없음이 불가하고, 재예는 사람의 지식을 양성하여 사물의 이유를 이르며 본말의 공용을 헤아리게 하여 인세의 지식을 관찰하게 하는 것인즉 그 교육의 없음이 불가하고, 공업에 이르러서는 백천반심노력(百千般心勞力)에의 제조 운용을 관계하니 인세의 생도(生道)를 세워 이루는 것인즉 그 교육의 결핍함이 또한 불가하여 이를 이르러 교육의 3대 강령이라. 그 실상은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대취지이니 방국(邦國)의 빈부강약, 치란존망이 그 백성 교육의 고하 유무에 있는 것이다.143)
유길준은 교육의 3대 강령을 도덕·재예·공업으로 나누었고, 이를 통해 정덕·이용·후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부강은 곧 백성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교육을 통해 개화 국가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으며, 서구의 교육 제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학교 기관의 설립, 국가 중심의 교육 정책 강구, 실용적 교육 내용으로의 전환 등 개혁 추진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백성의 지식이 부족한 나라를 졸연히 백성에 국정 참여하는 권리를 허락함이 불가한 것이다. …… 그러므로 당국의 군자들은 그 백성을 교육하여 국정 참여하는 지식이 있은 연후에 그 정체를 의론함이 가하니 이 정체가 실시된 연후에야 그 나라가 개화되기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무지한 백성에게 참정 권을 주기보다는 먼저 교육을 받고 지식이 쌓여야만 국정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유길준은 당시 조선을 반개화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국가가 직접 무지몽매한 백성을 교육하여 개화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인식은 “국가의 대본(大本)은 교육하는 도(道)에 재(在)하니 현금(現今) 부강하기로 유명한 제국(諸國)은 모두 이 일사건(一件事)을 면려(勉勵)하여 그 효과를 획치(獲致)함이라.”고 한 것처럼, 교육을 부강 달성의 기초로 파악한 데서 연유하였다.
개화론자의 교육 개혁 구상은 교육 기관 설립으로 연계되지 못했다. 청나라와 일본의 교육 실태를 파악해 조선 정부가 현실적으로 도모한 것은 통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뿐이었다. 온건론자는 국가 존립을 청나라와 연대하는 것에서 찾았고, 급진론자는 청나라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즉, 전자는 현실을 긍정하는 개혁 성향이 강하였고, 후자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이를 토대로 하여 근대적 교육관을 표방할 수 있었다. 이들이 제시한 교육 개혁은 사회적·정치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추진할 요소들로,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대 개혁을 달성하는 데 ‘교육의 힘’을 긍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점진적으로 국민 교육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34) | 조선 정부의 무비자강책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조선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던 것으로 지적된다(연갑수, 「개항기 권력 집단의 정세 인식과 정책」,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113쪽). |
---|---|
135) | 동도서기는 『주역』에서 인용한 어구로, 1880년대 당시 신기선·김윤식 등이 거론하였고, 조선 정부의 근대화 이론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당시 동도는 이른바 조선 왕조의 질서를 유지한 채,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절충론으로 이해된다(권오영, 「동도서기론의 구조와 그 전개」, 『한국사 시민 강좌』 7, 일조각, 1990, 78∼81쪽). |
136) | 『고종실록』, 고종 19년 12월 28일. 이 교서를 ‘공식적’으로 교육권을 균점시키도록 한 최초의 국가 시책(정순목, 「한국 개화 교육의 이상과 전개」, 『한국 교육 연구』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47쪽), 또는 ‘국가 차원에서 교육 기회의 균등’을 선언한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이은송, 「초기 개화파의 근대 교육 개혁론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115쪽). |
137) | 『김윤식 전집(金允植全集)』 권7, 「16사의 제1 낙법」. |
138) | 이은송, 앞의 글, 1998, 101쪽. 한편, 그가 강조한 학교 교육은 전통 유학보다는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선비보다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통·평등 교육으로 간주되기도 한다(한철호, 「1884∼1894년간 시무개화파의 개혁 구상」, 『사총』 45, 1996, 196쪽). |
139) | 신용하,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의 設立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10, 한국사연구회, 1974 : 『초기 개화 사상과 갑신정변』, 지식산업사, 2000, 158∼159쪽. |
140) | 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85, 95∼96쪽. |
141) | 『김옥균 전집(金玉均全集)』, 「지운영 사건 규탄 상소문」, 1979, 145∼147쪽. |
142) | 김갑천 옮김, 「박영효의 건백서(建白書)」, 『한국 정치 연구』 2,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990, 278∼279쪽. |
143) | 유길준, 『서유견문』, 1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