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근대의 배움과 가르침

2. 동문학과 육영공원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김윤식이 이끈 영선사 일행이 귀국함으로써 약 1년에 걸친 새로운 군사 기술 습득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김윤식은 청나라에 파견되었을 당시 이홍장(李鴻章)에게서 조선의 통상과 외교에 대해 자문을 받게 된다. 또한, 개항에 따라 해관(海關)을 관장할 수 있는 관리를 추천받는데, 그가 바로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였다. 그는 조선의 해관 담당은 물론 외교에 대해서도 자문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통상이 현실화되자, 이를 담당할 수 있는 인물을 양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고 추진하였다. 영선사를 이끌었던 김윤식도 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보기로 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동문학을 통해 배출된 인물은 근대적 기구인 해관·전국(電局) 등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단기간 어학 연수를 받은 하급 관리였다.144) 동문학의 운영 실태와 졸업생의 현황, 교육 상황은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에서 찾을 수 있다.

통상아문에서 동문학이라는 영어 학숙을 개설하고 생도를 모집했다. 작 년 7월에 영국인 해래백사(奚來百士, Hallifax)를 초빙하여 교사로 삼았는데, 일어까지 통한 데다 학술도 있어서 교수 방법이 좋았으므로 생도들이 점점 발전 일로에 있다. …… 교학 규례는 생도를 절반으로 나누어서 절반은 오전에, 절반은 오후에 수업하게 하고, 하루는 장어, 단어, 문장을 해독·변통하는 법을 가르치며, 하루는 장어는 빼고 다만 단어와 서양 필산(筆算)을 가르치는데, 날로 장진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각 곳에 파견하여 견문을 넓힐 예정이다(『한성순보』 15호, 1884년 3월 19일자).

그리하여 15세 이상의 총명한 자제를 선발하여 영문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 해마다 6월과 12월에 재예(才藝)를 시험 보여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진하기를 권장한다. 그 가운데 우등인 학도로 남궁억(南宮檍), 신낙균(申洛均), 권종린(權鍾麟), 홍우관(洪禹觀), 성익영(成翊永), 김규희(金奎熙)는 이미 관(官)에 임용되었는데, 상무(商務)의 교제에 있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한다. 이철의(李喆儀), 류흥렬(柳興烈), 이자연(李子淵), 송달현(宋達顯)은 전국(電局)에 파견하여 겸임으로 학습시키고 있는데, 모두 민첩하고 숙달하여 정식 임용할 만하다고 한다. 12월에 도강(都講)하여 재예를 고사(考査)한 다음 등급을 정한다. 현재 학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모두 30인인데 아래 기록한다(『한성주보』 4호, 1886년 2월 22일자).

이 내용에 따르면, 동문학은 1883년에 설립되었고, 1884년과 1886년 현재 총명한 자제들을 선발하여 영문과 영어를 가르쳤다. 1886년 재학생은 총 30명으로, 이들은 능력에 따라 다양한 근대적인 기구에 임용되었다. 동문학의 수업 기한은 약 1년으로, 교육 내용은 영어와 필산 등이었다. 동문학에 입학한 인재들이 주로 중인층에서 선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145) 이들은 이미 어학(語學)과 통상(通商)에 상당한 능력이 있는 인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김윤식은 “나이가 젊고 총명한 자를 가려 뽑았 다. 외아문에 학당을 열었는데 중국인 오중현(吳仲賢), 당소의(唐紹儀) 두 사람이 양어를 가르쳤다.”, “어학생을 뽑아 동문 학교에서 가르쳤고 …… 생도는 40여 인이었다.”라 하여, 동문학 설립 당시 교사진과 학생들의 면모를 언급하였다.

이처럼 동문학의 교사진은 어학과 실무에 밝았던 외국인이었고, 교육 내용은 통상에 따른 초보적인 어학과 기술이었다. 졸업자들이 근대적 기관에 실무자로 임용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외국과 교섭할 때 필요한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기포드(Gifford)는 학생 가운데 “15명이 지금 각 개항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듯이, 대단히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동문학의 교육적 성과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실무 능력은 주로 개항지에서만 빛났을 뿐이지, 외교적 교섭이나 정책 수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문적으로 영어와 상무 지식을 익힌 그들이 외국과 교섭하는 데 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동문학은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다고 한다. 당시까지 동문학은 근대적 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할 유일한 인력 양성 기관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대상과 내용에서도 육영공원과의 연계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면 폐지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기 청나라는 속방(屬邦)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그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시 동문학을 주도한 묄렌도르프는 총세관사로 전환국, 외교 정책 등에 깊이 관여했고, 여기에 필요한 실무진의 양성과 배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당초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와 해관 등을 담당하였지만, 조선·러시아 밀약에 개입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도하였기에 청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한미 조약에서도 그러했듯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146) 이러한 분위기에 묄렌도르프의 입지는 좁아지고, 결국 청나라로 소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가 추진하였던 동문학이 중도에 폐교된 것도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불과 3년 동안 운영된 동문학은 개화 정책에 필요한 실무 인력의 양성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지를 잘 알려 준다.

고종은 미국과 외교 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는 방책을 구상하는데,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설립한 육영공원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종은 이미 1883년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해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147) 조선 정부는 미국에 외교·군사·농업에 대한 자문과 기술을 요구하였고, 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갑신정변으로 늦어졌으나, 1886년에 미국인 교사 세 명이 내한함으로써 9월에 공원이 설립되었다. 육영공원의 설립을 미국에 의뢰한 것은 청나라의 견제를 피하고, 조선 정부가 자주적 명분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조선책략』에서 청나라는 미국을 “타국의 토지와 인민을 탐하거나 정치에 간여하려 하지 않는다. ……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 여러 대국과 같으며 동서 양양(洋洋)에 연하고 있어서 늘 약소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인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라고 긍정적·호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성순보』는 “합중국은 인자하고 정의로움이 과연 5주 가운에 탁월하다.”고 평가하였다.

미국과의 통상 문제로 이홍장과 회담한 김윤식도 “서양 여러 나라 가운데 미국은 나라가 부유하고 심성이 공평하고 온화하다. 나라가 부유하니 탐하는 게 적고 병력은 강하니 의지할 만하다.”148)라고 하여, 호의적인 미국관으로 교섭에 임하였다. 이렇듯 조선과 청나라는 미국을 국제 무대에서 균세(均勢)를 지켜 나가는 국가로 인식하였고, 양국의 전통적 관계를 지켜 줄 수 있는 최적격자로 보았다. 육영공원의 설치 규정은 보빙사가 도착한 이후 미국 공사관 측의 제의로 진행되어 갔다.

공원을 좌우로 나누어 좌원(左院)에서는 과제 출신(科第出身) 참하 연소자(參下年少者) 10원(員)을 별선하여 한문·경사·서어를 학습하게 하고, 우원(右院)에서는 재질이 총혜한 15세부터 20세에 이르는 자 20인을 가려 뽑아 독서·습자·자법·산학·지리·문법을 학습하게 하되 초학(初學)을 졸업한 뒤 대산법(大算法)·각국 언어·의학·농리(農理)·지리·천문·기기(機器)·각국 역사·정치(각국 조약법 및 부국용병(富國用兵)의 술(術))·금수(禽獸)·초목(草木) 등을 학습하게 하는 것 등이다(『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2집, 1886년 8월 1일).

학생은 당초 좌원 10명, 우원 20명으로 관료들의 추천을 받아 뽑았다. 좌원은 젊은 문무 관리에서 충당하고 우원은 양반 자제 가운데서 뽑았는데, 이들은 기숙사에 상주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어학을 중심으로, 자연과학·수학·지리·경제 등 다양한 근대적 지식 내용이 포함되었다. 좌원과 우원이 궁극적으로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는 전통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언어와 서양 지식을 교수한 것은 장차 새로운 교과의 탄생과 과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담당 관리는 당상과 주사, 교습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어학에 능통한 참사는 교습(敎習)을 담당하였는데, 동문학 출신 권유섭(權柔燮)과 최영하(崔榮夏)가 임명되었다.

「육영공원 등록(育英公院謄錄)」에 “현금 각국이 교제(交際)하는 데 어학(語學)이 가장 급무라서 공원을 설치한다.”고 한 것처럼, 공원 설치는 어학 교육의 긴박성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당상이던 민종묵(閔種默)은 “언어 문자를 가르쳐서 외교 교섭의 규칙에 자세하고 통상의 조목에 밝게 하면 비로소 남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끌려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어학 교육의 중요성을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이미 영선사가 입국할 당시, 어학을 배우지 않으면 속임을 당하고 해를 입게 되므로 반드시 5년은 배워야 한다고 청나라에서 제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육영공원은 외국어를 비롯한 서양 문물을 습득하여 외교(外交)와 내치(內治)에도 참여할 수 있는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양반 자제를 입학시켜 어학을 교육하였는데, 이들이 장차 정책 결정에 참여할 정도의 중견 관리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국왕은 학생들의 시험 성적과 출결석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국왕의 의지에 따른 관료 양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공원의 학칙이었던 「육영공원 설학 절목」에 따르면, 운영비는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매달 반반씩 부담하였고, 세관세로 교사의 월급을 지불할 만큼 재정 구조가 튼튼하였다.

이 밖에 수업 시간, 방학, 교과, 학생 생활, 시험, 장학 등 세세한 규정은 갑오개혁 학제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학생 수업은 매일 여섯 시간씩으로,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오후 1시부터 3시까지였다. 겨울에는 수업이 네 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그리고 휴업(휴가)은 명절·성절·외국 명절에 하였고, 방학은 12월 말(겨울)과 여름으로 정했다.

1889년까지 육영공원을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학생은 총 107명이었다. 공원의 교육 기간은 3년으로 언어 교육과 지식 교육을 체계적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절목에서는 “품계가 올랐다고 하더라도 졸업하기 전에 공부를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라는 규정을 두어 학생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 원칙은 오래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완용(李完用)은 1886년 8월 좌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박정양(朴定陽)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선발되면서 공원에서 더는 수업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이 주로 양반층이었다는 점은 서양식 수업 방법과 교육 내용을 제도화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육영공원은 소수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그런데 국가의 개혁 정책에 필요한 인재 양성이 이들 소수 양반 자제의 관직 진출의 수단으로 전도되었다. 또한, 정부는 서구의 선진 문화 수용이라는 긴 안목보다는 통역관 위주의 어학 교육에 치중하였다. 고종은 수업 시기를 조절하고, 상벌 조항까지 마련하는 등 각별한 관심 을 보였지만, 공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수업을 담당한 교사 길모어(G. W. Gilmore)는 육영공원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애초 학교를 운영하는 관리들은 그에게 영어를 잘하여 훌륭한 학생으로 합격시킨 뒤 좀 더 높은 벼슬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149)

이 지적은 공원이 보편적이고 공정한 교육 기관으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함을 말한다. “학원(學員)이 이유 없이 병을 핑계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고 교사가 그냥 돌아가는 지경”처럼 학생들의 결석률이 높아졌다. 또한, 좌원은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어를 수박 겉 핥기식으로 익혔기 때문에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고 너무 나태해서 공부할 뜻이 없어” 보였다. 이에 교사들은 “학생들은 비공직자(우원)에 한하며 성적에 따라 장학금을 수여하고 규정 출석일에 미달하는 사람은 퇴학 처분을 내리는” 방안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 조처는 우원만으로 공원의 내실화를 기하려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애당초 근대적 개혁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젊은 현직 관료를 재교육한다는 명분은 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재정 기반이 악화되고, 교사와 관료의 마찰과 학생들의 불만이 계속되면서, 공원은 존폐의 갈림길까지 다다랐다. 결국 육영공원은 어학과 서구 학문을 교육해 근대적 관료를 양성한다는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1894년 영어 학교가 설립되면서 폐교되었다.

[필자] 위영
144)1883년 9월 동문학도 가운데 윤정식·민상호·윤시병 등은 상해와 홍콩에 파견되어 언어와 문자를 배웠다고 한다(이광린, 『한국 개화사 연구』, 1989, 109쪽). 이진호(李軫鎬)는 의학교 학생으로 선발, 이후 무관 학교를 졸업하였다(유방란, 앞의 글, 1995, 20쪽). 홍우관은 통리아문 주사를 거쳐, 이후 주차 일본 서기관·학부참서관·외국어 학교 교장·농상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고종시대사』). 이 외에 김창현은 통리아문 주사, 심노한·이학인은 인천 해관, 김경하는 제중원 주사, 방경희는 영국 공관, 권종린은 원산 해관에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145)김경미, 「갑오개혁 전후 교육 정책 전개 과정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45쪽 ; 김경미, 「1880년대 외국어 교육의 교육사적 위치」, 『연세 교육 연구』 12-1, 1999, 25쪽.
146)김원모, 「조선 보빙사의 미국사행(1883) 연구(상)」, 『동방학지』 4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50쪽. 한편, 육영공원을 비롯한 각종 근대 기구에 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을 고빙하거나 미국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주진오, 「한국 근대 국민 국가 수립 과정에서 왕권의 역할(1880∼1894)」, 『역사와 현실』 50, 한국역사연구회, 2003, 57쪽).
147)보빙사의 일원이었던 홍영식은 미국의 교육 제도를 소개하기를, “우리가 가장 중요시할 것은 교육에 관한 일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 방법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법을 본받아야 합니다.”(김원모, 「견미사절 홍영식 복명문답기」, 『사학지』 15, 단국대학교, 1982, 216쪽)라고 하여, 미국의 교육 제도가 언급되고 있다.
148)『운양집』 권11, 「상북양대신이홍장서(上北洋大臣李鴻章書)」. 미국·서구 열강과 조선의 외교 관계 수립에서 청이 조선에 대해 전통적 우위에 있음을 서구에 인식시키려는 전략적 사고였다(김기정,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와 동아시아」, 『1894년 농민 전쟁 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220쪽).
149)이광린, 「육영공원의 설치와 그 변천에 대하여」, 『동방학지』 6, 1963, 114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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