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한제국과 근대 교육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 제도는 전통 교육과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문명 개화와 자주독립을 위한 인재 양성이 교육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 후 국가의 존립이 위기에 봉착하자 교육을 통한 근대화와 독립 의지는 더욱 높아져 갔다. 대한제국은 내적으로는 문명 개화를 이루고 외적으로는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교육 목표를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근대적 인재 양성’에 두었다.
갑오개혁 과정에서 추진된 교육 개혁은 단적으로 근대 보통 교육을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소학교와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 법령이 마련되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운영됨으로써 국가 주도의 교육 방향이 정착되었다. 학교라는 공간이 법적으로 규정되었으며 교육 내용은 근대적 지식으로 무장한 다양한 교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 내용과 제도를 근대화하여 국민 대중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풍조가 교육 개혁에 반영되었다. 게일(J. S. Gale)의 지적처럼 “천 년 동안에 있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이 교육의 급변이었다.150) 새롭게 마련된 학교는 “개진 문화(開進文化)하는 공간으로서, 국가 인재를 양성하여 부강의 주역으로, 국가 흥폐(興廢)의 중추”였다.151)
이에 따라 보통학과 전문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단계적으로 설립되었다. 즉,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외국어 학교, 중학교, 의학교, 농상공 학교, 전무 학교, 우무 학교, 무관 학교 등 국민 보통 교육 기관과 전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 기관이 설립·운영되었다. 특히, 종래 최고의 고등 교육 기관이던 성균관에는 본국지리·만국사·만국지지·산술 등의 교육 내용이 포함되었고, “학생이 경학(經學)을 이습(肄習)하고 덕행을 수칙(修飭)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主意)함”으로 문명 습득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다.
학 교 명 | 관제(규칙) | 입학자격 | 입학연령 | 수업연한 | 학 년 | 수 업 시 수 | |
한성 사범학교 |
본과 | 1895(1895) | 20∼25세 | 2년 | 전·후학기 | 42주, 매주 28시간 | |
속성 | 22∼35세 | 6개월 | |||||
외국어 학교 | 1895(1900) | 15∼23세 | 춘·추학기 | 매일 5시간 | |||
각 학교 | 일어 | 1891(1900) | 3(4)년 | ||||
한어 | 1897(1900) | 3(4)년 | |||||
영어 | 1894(1900) | 5년 | |||||
법어 | 1895(1900) | 5년 | |||||
아어 | 1896(1900) | 5년 | |||||
덕어 | 1898(1900) | 5년 | |||||
(농)상공 학교 | 1899(1904) | 17∼25세 | 4년 | 춘·추학기 | 매일 5시간 | ||
의 학 교 | 1899(1899) | 중학교 졸업자 | 20∼30세 | 3년 | 춘·추학기 | 매일 5시간(체조 제외) | |
중 학 교 | 심상 | 1899(1900) | 고등 소학 졸업 | 17∼25세 | 4년 | 춘·추학기 | 매일 5시간 (체조, 실습 시간 제외) |
고등 | 3년 | ||||||
소 학 교 | 심상 | 1895(1895) | 7∼15세 | 2∼3년 | |||
고등 | 심상 소학 졸업 | 2년 | |||||
성 균 관 | 1895(1895) | 20∼40세 | 3년 | 전·후학기 | 42주, 매주 28시간 | ||
*김영모, 『조선 지배층 연구』, 일조각, 200∼291쪽 |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학무아문(이후 학부)이 설치되었다. 학부의 조직과 기구, 역할은 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외세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 발발 시점부터 조선의 내정 개혁에 그들의 위세를 심기에 분주하였다. 당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이 제시한 일련의 내정 개혁안은 국민 보통 교육을 위한 소학교 설립, 사범학교 운영, 유학생 선발과 파견 등으로 정리된다. 또한, 학부에 고빙(雇聘)된 일본인은 주로 학부의 운영과 조직에 대한 자문을 맡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교과서 편찬에 직접 관여하는 등 교육 내용의 영역까지도 개입하였다.
한편, 내적으로 제기되어 온 교육 개혁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1880년대 교육 개혁론은 국민 교육이 중요한 전제였다. 또한, 개항에 따른 청나라와 일본의 근대화된 문화 수용은 조선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이자 극복의 과제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론자뿐만 아니라 개항을 추진한 세력까지도 서구 교육에 관심이 상당히 많았고, 부국강병을 위해 군 사 교육을 근대적으로 실시하고 개항에 따른 어학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시세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육영공원의 어학 교육은 당면한 외교 문제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인재 양성 정책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일본의 위세가 약화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교육의 제도적 측면을 보완하거나 강화하여 나갔다. 이처럼 정부는 교육 개혁의 주체로, 형식 면에서 일본의 교육 제도를 참작하였지만, 내용 면에서 다양한 근대 지식을 교수하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 하였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근대적 인재는 ‘신민의 자질을 갖춘 국민’이었다. 즉, 1895년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敎育立國詔書)의 강령이던 ‘지덕체(智德體)’는 곧 신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 이념 그 자체였다. ‘덕’, 곧 덕성 함양은 학교에서 공통으로 교수해야 할 최고 이념으로, 종래 성리학적 사회 질서로 규율하던 도덕에서 사회도덕으로의 이념 변화를 전제로 하였다. 그리고 ‘체’는 근대적 국민에게 필요한 신체적·정신적 규율이며 행동 강령 이었고, ‘지’는 부강과 독립을 위한 실용적 학문이었다. 교육은 다양한 가치와 지식의 지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요소였다. 충군애국, 문명 개화, 독립, 부강은 근대 교육의 지상 목표였고, 정부에서 자신한 근대화의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육 개혁은 국민 보통 교육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볼 수 있으나, 근대성의 기준과 인식이 국민 다수를 대상으로 한 교육 개혁으로는 미흡하였다. 당시 교육 이념을 반영한 수신 교과는 “존왕애국(尊王愛國)하는 토기(土氣)를 양(養)함을 무(務)하고 또 신민(臣民)으로써 국가에 대하여 책무(責務)의 대요(大要)를 지원하고”라고 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자질을 갖춘 근대적 신민을 요구하였다. 이 같은 교과 요지는 교육 입국 조서에서 “이신민(爾臣民)은 충군애국하는 심성으로 …… 왕실의 안전함도 이신민의 교육에 있고, 국가의 부강함도 이신민의 교육에 재(在)하니”라 한 것의 반영이었다. 이렇듯 교육받은 개인을 주체로 간주하기보다는 전통적 교육관에 근거를 둔 인재를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근대 개혁을 궁구해 가는 과정에서 외세의 직접적인 군사·정치·경제 개입으로 조선 사회에서 신민(臣民)은 내·외적인 압력을 받는 이중 착취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농민 전쟁에 가담하거나 의병으로 활동한 인민은 국민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적도(敵徒)’나 ‘토비(土匪)’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개혁 사업에 요청되는 신민은 충군애국하고 근대적 지식을 갖출 수 있는 인재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범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교육을 받아 개명된 인민만이 정치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전까지 개화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자강 개혁의 추종자로서 기대되었다. 이처럼 갑오개혁에서 강조한 일련의 교육 개혁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조선의 지배 질서를 공고히 하면서 군주의 권위에 입각한 신민 교육이 다방면으로 전개되었다.
국민 통합의 창출이라는 지배층의 노력은 신민된 의무를 강제하기도 하였다. 국왕과 국가를 위해 각종 기념일이 제정되어 황실의 지고 지엄(至高至嚴)한 가치가 더욱 강조되었고, 학교마다 애국가 제창·국기 게양·황실 축수 등 의례를 통해 균질적 국민 창출을 선도하였다.
애국하는 것은 학문상에 큰 조목이라. 그러므로 외국에서는 각 공립학교에서 매일 아침에 학도들이 국기 앞에 모여 서서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고 그 나라 임금의 사진에 대하여 경례를 하며 만세를 날마다 부르게 하는 것이 학교 규칙에 제일 긴요한 조목이요. …… 국기라 하는 것은 그 나라를 몸 받은 물건이라(『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자 논설).
위의 예식은 학교 현장에서도 부단히 강조한 사안들로, 근대적 국민 창출의 교육 행사로 굳어 갔다. 또한, 국기의 의미는 “위로는 임금을 몸 받은 것이요 아래로는 인민을 몸 받은 것이라.” 하여 상하의 논리로 이해되었다.152) 애국심의 배양은 국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참여하는 각종 행사에도 빠짐없이 강조되었다. 일상성을 통한 정당성 획득은 의례의 공고화를 가져왔고, 여기에 근대적 국민 창출은 국가주의적 교육 이념과 부동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 교육의 확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등 공신은 언론이었다. 아관 파천 이후 결성된 독립 협회의 간부들은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자존과 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에 젖어 교육이 곧 문명 개화를 이루는 첩경이자 국가의 독립과 부강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외에 『황성 신문(皇城新聞)』이나 『제국신문(帝國新聞)』 등도 어느 정도 시각차는 있지만, 대부분 교육을 통해 부강과 독립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 신문에서 강조된 교육의 필요성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교육 정책을 긍정적으로 보고 이들과 동등한 국체(國體) 확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은 문명 개화를 달성한 부국강병 국가로 설정됨으로써 자주 국체의 본보기가 되었다.
일본국이 30년 전에 극히 쇠약하더니 지금은 동양에 제일 개화되어 국부병강(國富兵强)하고 인민이 태평한지라. 어찌 그러한가 하니 인재를 교육함이라. 우리 조선 사람들도 인재가 없는 바 아니로되 교육이 없는 까닭이라. 이제부터 교육을 힘쓰면 나라가 저절로 자주 기초가 더욱 튼튼하여 질 것이다(『독립신문』 1897년 9월 2일자 잡보).
동양에서 제일가는 일본을 교육을 통해 자주적 기반이 완성된 국가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이 따라가야 할 모범이었고, 여기에 부수된 문명 개화, 자주독립 등은 근대적 인재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여겼다. 전통 학문을 수구 학문으로 인식한 『황성신문』의 논설은 문명 개화의 장벽을 내적으로 수구적인 면모에서 찾았고, 현실적으로 학교가 설립됨으로써 개진 문화(開進文化)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독립신문』(1899년 9월 9일자)은 “동양 선비의 학문은 차차 약해지고 진보될 가망은 없는지라 …… 재주를 배양하는 데 과연 방해된다 할지라.”라고 하여 전통 학문을 폄하하고, 서구 학문을 통한 개명 진보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타진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전통 문화를 허영적·수구적인 것으로 인식한 논리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외압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연설회에서는 자주독립의 주체를 조선으로 설정하고, 그 자주를 억압한 담당자를 청나라로 등식화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였으나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망하지 못하였다.
대군주 폐하 탄신 날에 …… 모든 교우를 흥기하여 독립가를 부르고 이영언씨는 연설하되 우리나라가 일찍 청국에 속하여 종노릇을 하더니 지금은 자주국이 되었으니 우리 인민들도 각각 자주할 마음을 두어 …… (『독립신문』 1897년 9월 2일자 잡보).
교육 개혁을 표방한 갑오개혁 담당자들은 일련의 제도를 정비해 문명 개화의 기반을 마련하려 하였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는 끊임없이 교육이 문명 개화의 기초라고 재음미하였다. 당시 조선은 반개화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최고의 문명 개화국으로 서구 열강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다음으로 일본은 개화국, 청나라와 조선은 반개화국이었다. 따라서 “죽기를 무릅쓰고 정부 뒤를 받쳐 주는 고로 몇 해가 아니 되어 자기의 나라가 제1등 문명 개화국 등수에 올라”갈 수 있으니, 백성의 학문과 지식을 넓히기 위해 정부는 교육의 소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 보통 교육의 실현이라는 취지는 곧 관·공립 소학교와 사범학교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물론 1904년까지 정부는 전문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이들 학교는 보통 교육 기관이었다기보다는 서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아주 적은 수요자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교육 개혁의 취지를 반영한 교육 기관은 전국에 산재한 소학교와 사립학교가 대표적이었다. 국민 보통 교육의 전제는 소학교의 설립에 있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1897년 7월까지 소학교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학부령으로 지방 공립 소학교를 설치한 곳은 한성부·수원·충주·공주·전주·광주·대구·진주·해주·평양·정주·춘천·함흥·경성·개성부·강화부·인천항·부산항·원산항·경흥항·제주·양주·파주·정주·홍주·임천·영광·경주·안동·안악·의주·강계·성천·원주·강릉·북청이라(『독립신문』 1896년 9월 21일자 관보).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관찰부 소재와 항구·군·부 등에는 38개의 공립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지방 소학교는 관립 소학교와 달리 사립 소학교에서 전환하는 사례도 있었다. 「소학교령(小學校令)」에 의거 사립학교에서 공립 소학교로 전환할 경우에 국가는 교원을 한 명 보내고 월봉을 부담하였다.153) 보조금 지급은 소학교를 확충하려는 국가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에 1906년 당시까지 13개 관립 소학교와 110개 공립 소학교가 서울과 지방에 설립될 수 있었다.154) 한편, 학교가 증가하여 학생은 늘어났지만, 기대만큼 충원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10월 현재를 전후한 시기 관공립 학교 학생 수는 다음과 같다.
사범 학도 30명, 영어 학도 50명, 소학교 학도 105명, 수하동 175명, 공동 81명, 재동 79명, 매동 137명, 양사골 105명, 양현동 59명, 안동 75명, 주자골 58명, 영어 학도 108명, 일어 학도 94명, 법어 학도 73명, 아어 학도 88명, 한어 학도 49명이니 …… (『제국신문』 1898년 10월 15일자 잡보).
1898년 10월 현재 한성부의 소학교에는 공립 소학교 60명과 관립 소학교 874명으로 모두 934명이 재학 중이었다. 비슷한 시기, 『황성신문』(1898년 9월 9일자 논설)에는 “지금 경성 내외 각 학교에 있는 학생은 2,000명을 넘지 못하니.”라 하였다. 한편, 1897년 9월 안동 관립 소학교 교원 안영상의 편지에는 “소학교는 불과 8곳뿐이오, 학도가 불과 500명인즉 …… 올 봄에 심상과 졸업이라 하였으나 심상과 졸업한 후에는 또 다른 교과가 없어 소학교 명색이 8처 외에는 다시 더 확장이 없으니 제일 한심한 일이라.”고 했는데, 소학교는 물론 학도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지적했다.
이처럼 국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소학교의 운영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앞의 『제국신문』에는 1898년 지방 공립 소학교의 학생 현황도 보도되었다. 즉, 수원 28명, 충주 30명, 공주 23명, 전주 36명, 해주 18명, 평양 52명, 춘천 9명, 함흥 43명, 경성 36명, 인천항 28명, 부산항 59명, 원산항 26명, 경흥항 23명, 삼화항 31명, 무안항 22명, 김포군 14명 등으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광주·영변·개성 등지에는 재학생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물론 공립 소학교는 학생이 증가함에 따라 교사(校舍)가 신축되거나 증설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1899년 11월 경기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는 학생 수가 48명으로 늘어나자 학교 건물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당면 과제는 학교 운영에 따른 재정 지원에 있었다. 안영상은 당시 학부에 대한 비효율적 재정 지원을 지적하였다.
학교비를 학부에 청구한즉 학부에서 경비가 부족이라 칭하기에 8,400원을 12삭에 분배하니 매삭에 700원씩이라 8처 소학교 경비를 타산한즉 매삭 용비가 불과 400원가량인데 경비가 부족된다 하니 …… 8처 외에는 학교를 더 배설할 경륜들이 없고 도로 예산 금액을 남겨서 탁지부로 환부하는지 이 관원들은 학부 관원이 아닌 듯하더라(『독립신문』 1897년 10월 2일자 잡보).
이 내용을 보면, 1897년 8곳의 소학교 경비가 매달 700원으로 책정되었으나, 실제로는 매달 400원가량만 지출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안영상은 학부 관리들이 자진해서 탁지부(度支部)에 예산을 반납하는 사정을 비판하였다. 이 같은 학부의 재정 운영을 고려할 때, 공립학교 지원 은 더욱 궁색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학부에서는 지방 학교의 재정 상태를 “해군에서 감독하는 직권이 있거늘 부군에서 등한히 보아 그러한지 교원이 불민하여 그러한지 한갓 보조비만 할진데 차라리 확실하게 둘 것은 두고 폐할 것은 폐할 터이니”155) 라 하여, 지역에 책임을 전가할 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방침에도 지방 학교는 보조비에 기대를 걸었지만, 학부는 “학교 예산을 탁지부에서 다 감삭하여 지급할 도리가 없으니 각기 학교에서는 방편을 궁구하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사실 예산 배정이 시작된 1898년부터 1905년까지 보조금을 받은 공립학교는 절반가량이었다.156) 지방 공립 소학교는 지방 관찰사나 유지 등이 재원을 보조하거나 직접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학교 건물로 향교·서원·관아 등의 부속 시설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향교와 서원의 부속 토지 일부를 재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방민과 교토(校土)나 원토(院土) 사용을 둘러싼 마찰이 종종 일어났다.
한 예로 1899년 철원군 공립 소학교는 지역의 서원과 향교에서 경비를 충당하다가 지역민들이 소학교를 부수고 군수를 능욕한 일까지 있었다. 이 외에도 대한제국의 황실 예산을 담당했던 내장원(內藏院)은 교토와 원토에 관심이 있었다. 갑오개혁 당시 탁지부가 황실 재정과 정부 재정을 일원적으로 담당하였지만,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실 재정이 분리되자 내장원은 적극적으로 재원 마련에 나섰던 것이다. 1899년에 지방에서 내장원이 도조의 수취를 본격화하자 각 학교에서는 학부에 해결을 기대하게 되었다.
공주군 공립 소학교에 붙은 원토 토지를 내장원에서 뺏아 간다고 해(該) 학교에서 학부로 전보하였기에 해 학부에서 궁내부로 조회하였더라(『독립신문』 1899년 12월 2일자 잡보).
재작일 학부에서 탁지부(度支部)로 조회하기를 13부 관하 각 군 공립 소 학교가 26처인데 매교(每敎) 매삭(每朔)에 보조비 30원씩이라 각기 해군 공전(公錢) 중으로 외획(外劃)하여 주라 하였는데 1년 총계은이 11,760원이라 하니 현금 국고에 재정이 군출(窘絀)한데 거액을 지출하여 교육상에 여차주의(如此主意)하니 학원들은 부디 실심 주업(做業)하야 타일에 국가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되기를 기망(期望)하노라(『황성신문』 1899년 2월 20일자 잡보).
그러나 내장원의 계속된 황실 재원 확보로 공립 소학교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가령 1900년 11월 외도 공립학교의 보고에 따라 학부에서는, 원둔토(院屯土)를 학교로 부속할 차로 내장원으로 조회하였더니 내장원에서 조복하기를 “각 원토를 내장으로 부속하여 이미 사검한즉 의론할 것이 없거니와 학교 경비는 응당 탁지부에서 지출할 터이니 학교에서 받아 쓴 기해년 도조(賭租)를 봉세관(封稅官)에게 출급하라.”는 내용뿐이었다. 게다가 내장원은 지난 도조까지도 수취함으로써 지방 학교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공립 소학교에는 매달 30원씩 보조비가 지급되었는데, 주로 지역의 공전(公錢)에서 충당되었다. 위의 사례처럼 학부가 각 군에 있는 지방 공립 소학교 26곳에 지급한 보조금은 매달 780원이었다. 그러나 「보조 공립 소학교 규칙(補助公立小學校規則)」(학부령 제1호, 1896)에 제시된 ‘50원 이내로 한다’는 규정보다 적은 액수였다. 보조금이 지급된 학교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당수 공립학교는 보조금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규칙에 따르면, 보조금 지급은 ‘출석 생도의 수효(數爻)가 40인에 급(及)지 못하는 자(者)’는 지급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 규정이 제대로 운영된 것으로 볼 수 없다. 표 ‘공립 소학교 보조비 내역’은 1896년부터 1905년까지 공립학교에 지원된 보조금 현황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보조금 지급 기준이던 학생 40명을 채우지 못한 항·부·군에도 예산이 배정되었다는 점이다. 앞의 1898년 『제국신문』의 학도 수효에서 알 수 있듯이, 각 항의 학교 가운데 40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부산 항밖에 없었다. 따라서 학생 수효는 엄격한 기준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보조금 지급에서 각 군보다는 도·항·부가 먼저 고려되었다.
이러한 재정 문제는 사립학교에서도 가장 큰 난관이었다. 사립 소학교가 교사와 재정 등 일반적인 사항이 마련되면, 공립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 이유도 재정 문제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립학교는 교사와 재정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갑오개혁은 국가를 중심으로 한 공교육적 틀을 확립하는 데 있었기에, 국가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국가의 교육 의지에 비하여 사립학교의 재정난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연도 지역 |
1896 | 1897 | 1898 | 1899 | 1900 | 1901 | 1902 | 1903 | 1904 | 1905 | |
한성부 | 600 각 신설 공립 소학교 보조비 13,800 |
600 | 600 | 600 | 600 | 600 | 600 | 600 | 600 | 19,360 | |
13 도 | 4,680 | 4,680 | 4,680 | 4,680 | 4,680 | 4,680 | 4,680 | ||||
항 | 6항 | 6항 | 9항 | 9항 | 9항 | 9항 | 9항 | ||||
2,160 | 2,160 | 3,240 | 3,240 | 3,240 | 3,240 | 3,240 | |||||
부 | 1부 | 2부 | 3부 | 4부 | 4부 | 4부 | 4부 | ||||
360 | 720 | 1,080 | 1,440 | 1,440 | 1,440 | 1,440 | |||||
군 | 5군 | 26군 | 25군 | 25군 | 25군 | 25군 | |||||
1,800 | 9,360 | 9,000 | 9,000 | 9,000 | 9,000 | ||||||
계 | 14,400 | 600 | 7,800 | 9,960 | 18,960 | 18,960 | 18,960 | 18,960 | 18,960 | 19,360 | |
총 수 | 학교 | 38 | 39 | 41 | 61 | 80 | 90 | 98 | 102 | 108 | 109 |
지 급 | 38 | - | 21(22) | 27(28) | 52(53) | 52(53) | 52(53) | 52(53) | 52(53) | 53(54) | |
지급률 | 100% | - | 51% | 44% | 65% | 58% | 53% | 51% | 48% | 49% | |
*이계형, 『한국근현대사연구』 11, 1999, 215쪽 ; 정재걸·이혜영, 『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 1, 한국 교육 개발원, 1994, 20쪽. |
가령 1899년 현재 시무 학교는 약속된 찬성금(贊成金)이 걷히지도 않 아, 학교 운영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현실이었다.157) 개인이나 단체에서 제공하는 의연금·보조금은 지속적으로 지원되지 못하였으므로, 재정이 충분하지 못한 사립학교는 언제라도 폐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지방관들이 부임지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한 것은 교육 풍토가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각 부 관찰사는 관내에 공립 소학교를 설치하기 이전에 사립학교를 대용할 수 있다.”고 한 「소학교령(제18조)」에 따라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은 학부에 공립학교로 전환해 줄 것을 청원하여 재정과 교사 수급 문제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 밖에 사립학교는 대부분 개인보다는 지역 유지·전직 관료·지역 주민 등이 공동으로 설립하였고, 의연금·찬성금·보조금 등으로 운영하였다. 지원금은 학교 증설과 확충·수리·이전 경비로 사용하였다. 지역민들은 학교에서 실시된 각종 행사, 교육 활동에 상품이나 교과서 등을 제공함으로써 학교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사립학교는 설립 초기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과 개명 진보 등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는 국권 회복과 독립 쟁취를 분명히 함으로써 교육 구국 운동에 일조하였다.
150) | 게일(J. S. Gale), 신복룡 역주, 『전환기의 조선』, 집문당, 1999, 1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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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 『황성신문』 1899년 7월 5일자, 논설. |
152) | 『독립신문』 1897년 4월 29일자 논설. |
153) | 이계형, 「한말 공립 소학교의 성립과 운영(1895∼1905)」, 『한국근현대사연구』 11, 1999, 201∼203쪽. 이 연구에 따르면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한 학교는 모두 22곳이었다. |
154) | 정재걸, 「개화기 공립 소학교 연구」, 『논문집』 30, 대구교육대학교, 1995, 353쪽. |
155) | 『제국신문』 1901년 1월 24일자 잡보. |
156) | 정재걸, 앞의 글, 1995, 371쪽. 보조비를 지급 받지 못한 공립 소학교 대부분은 사립학교에서 전환된 경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계형, 앞의 글, 1999, 218쪽). 공립학교가 중앙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정적으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정숭교, 「대한제국기 지방학교의 설립 주체와 재정」, 『한국 문화』 22, 서울대학교, 1998, 289쪽). |
157) | 『독립신문』 1899년 6월 24일자 잡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