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와 근대 국민
학생들은 당시에 필요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습득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문명 개화와 실력 양성이었고, 국가와 왕실에 대한 충성과 애국이 확고한 교육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징화 작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운동회와 그와 병행된 일련의 예식(禮式)들이다.
갑오개혁 이후 학제에 체조가 독립 교과로 설정되었다. 이는 「교육 입국 조서(敎育立國詔書)」의 3대 강령 가운데 하나였던 ‘체’가 교육 시수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한성사범학교는 “체육은 신체의 건강과 함께 떳떳한 기상을 기르며, 어려움을 참으며 근면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른다.”는 것을 요지로 학생의 건전한 정신과 신체를 강조하였다. 체조 과정은 대부분 보통 체조와 병식 체조(兵式體操)로 나뉘는데, 소학교는 심상과에서 보통 체조를, 고등과에서 병식 체조를 하였다. 특히, 병식 체조는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무관 학교 출신자를 교사로 임명하였다.
1901년 4월 4일자 『황성신문』 잡보에 “중학교와 관립 일어 학교에서 학부에 보고하기를 본교 교원에게 체조 운동을 교습할 터이나 교사가 현재 없으니 군부(軍部)에 조회하여 교사 1, 2인을 택송하라.”고 한 것을 보면, 중학교와 일어 학교의 체조 과목이 군사 훈련 위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02년에 학부는 각 외국어 학교 학도에게 “체조법을 교련할 터이니 본일부터 사관 50인을 파송하되, 토일 양 요일 외에 매일 하오 2시부터 2시 30분까지 시무케” 한다는 내용을 원수부에 조회하였다.
이처럼 소학교·중학교·어학교 등의 사례는 병식 체조가 중시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특히, 병식 체조의 중요성은 국가 존립에 대해 위기 의식이 심화되면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 대성학교 졸업생 김영식(金瀅植)의 회고담에 “체조 시간은 제일 존중하되 당시 체조 교사로는 원래 군대의 사관으로 뜻 높은 철혈(鐵血)의 인(人) 정인목씨였던바 전혀 군대식으로 교련(敎鍊)하였다.”167)라는 내용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병식 체조를 중시한 것은 개인의 강인한 체력이 장차 국가 독립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체육은 잡지에서도 교육의 중요한 분야로 언급하였다. 이창난(李昌煖)은 신체 건강을 행복의 기준으로 간주하면서, “먼저 체육을 힘쓴 후에 지육(智育)을 개발하여야 비로소 완전 사업을 성하리니”라 하여, 덕·지 교육에 앞서 체육을 제시하였다.168) 문일평(文一平)도 덕육과 지육을 구비하려면 체육이 근본이 된다고 전망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체육 학교 특설, 체조·격검·승마 과목의 설치는 물론 체육 학술을 연구하기 위한 유학생의 파견까지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근대 체육에는 개인의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국가 독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체육 교육의 실질적인 효과는 다양한 교외 활동을 통해 사회 운동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운동회는 학생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직원과 학교 근처의 주민들까지도 참여하는 지역 축제의 장이었다. 행사 장소는 서울의 경우 전 훈련원이나 삼선평, 장충단 등으로, 학교 운동장이 좁기 때문에 별도의 넓은 공간에서 실시하였다.
지방 학교의 운동회도 연합해서 개최하였고, 때로는 서울에서 열린 운동회에 일부 지방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운동회는 217회나 실시되었다고 한다. 당시 운동회에서는 제식 훈련(制式訓鍊)·집총 훈련(執銃訓鍊)·운동 경기 등을 제반 행사로 거행하였고, 일반 관민이 참여하는 경기도 마련하였다. 여기에 정부의 고위 관료, 외국 공사, 기자들은 만국기 아래에서 운동회의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5월 31일 각 관립 소학교 학원들이 훈련원에서 운동회를 하는데 정부 고관들과 교사들이 다 모이고 운동회를 마치매 학원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더라(『독립신문』 1896년 6월 2일자 잡보).
영어 학도들이 배재 학당 학도를 그저께 청하여 남산 밑에서 놀이를 하였는데 …… 문명 진보하고 학문을 속히 배워 진충보국하자는 뜻이요. 또 국기를 가지고 애국가들을 하고 …… 두 학교에서 지여 노래들을 하고 …… 배재 학도는 대군주 폐하를 위하여 만만세를 부르더라(『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자 잡보).
앞의 내용은 관립 소학교·영어 학교와 배재 학교 학생들이 훈련원에서 연합 운동회를 개최한 것을 전한 것이다. 학교 운동회는 보통 춘기(春期)와 추기(秋期)로 나누어 개최하였는데, 연설회와 애국가는 행사의 한 가지로 빠짐없이 시행하였다. 운동회가 열리는 곳에는 대한제국과 여러 나라의 국기를 게양하고, 중요 인사들이 배석하는 단상이 경계선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경찰관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국기 게양은 “조선 인민들이 차차 조선도 남의 나라와 같이 세계에 자주독립하는 것을 보이자는 뜻이라.”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학부대신이나 중요 인사들은 경기를 관람하면서 강건한 신체를 뽐낼 수 있는 운동회 개최를 적극 권장하고, 자신들은 개화 정국의 중심자로 자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연설회를 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목적은 문명 개화를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부국강병·충군애국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운동회는 보통 아침 7∼9시에 시작하여 오후 3∼4시까지 진행되었다. 경기를 마치면 이들은 매우 질서 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돌아갔다. 운동회 의 종목은 『독립신문』(1898년 6월 7일자 잡보)에 따르면, 200보 달리기·100보 달리기·높이뛰기·방울 던져 맞추기·넓이 뛰기·양인삼각(兩人三脚) 등으로 집단 내에서 경쟁을 촉구하는 경기들이었다. 특히, 1908년에 평양에 건립된 사립 대성학교의 운동회 종목은 40종이나 되었다고 한다.169)
상품으로는 좌종·우산·요대·연갑·칙대·묵구 등이 지급되었다. 상품은 운동회에 참여한 전체 학생을 기준으로 우등과 1·2·3·4등으로 나누어 지급하여 학교 간 서열 의식과 대항전을 제고(提高)하였다. 1906년 5월 관·사립 소학교 연합 운동회 때 운동 심판원들이 지방 학교인 계산학교(桂山學校)·영화학교 학생들의 성적을 일부러 조작하여, 이들 학교에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170) 1908년 관립 보통학교 운동회 때는 미동학교에서 졸업생을 대신 출전시켜 우등을 차지했다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등급 설정과 상품 지급은 ‘줄 세우기’와 우등을 향한 경쟁을 촉구하였다. 운동회의 우등을 결정하는 경기 장면으로 『독립신문』 논설에서 소개한 경성학당의 운동회를 주목할 만하다.
마당에서 다름박질하는 내기를 하는데 학도 다섯, 여섯씩을 나누어 다름질을 하여 제일 먼저 오는 사람에게 붉은 기를 주고 제2, 제3 사람에게는 흰 기를 주게 하는데 매우 재미가 있고 학도들이 힘을 다 뛰려 다름질을 하더라(『독립신문』 1898년 4월 15일자 논설).
달음질(다름질), 곧 달리기에 5∼6명의 학생들이 경주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1등에서 3등까지 학생에게만 상품을 준 것으로 짐작되는데, 1등은 붉은 기, 2등과 3등은 흰 기로 경기 결과를 평가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운동회는 학교끼리 대항전의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경기에 참여한 전체 학교를 대상으로 1등에서 5등까지 학생을 선발하였다.
이와 같이 등수에 따른 상품 지급은 경쟁 논리, 나아가 생존 경쟁 사회 라는 의식을 심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한 예로 1897년 4월 15일자 『독립신문』 논설은 “세상에 사람이 살려면 승벽(勝癖)이 있어야 그 사람이 언제든지 남보다 나가는 때가 있는지라 오늘 다름박질 내기 하는 것이 경계가 세계에서 사는 경계와 같은지라 누구든지 힘을 다하여 다름질을 하여 기어이 붉은 기를 먼저 얻으려 하는 사람은 세상에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라고 하여 운동회의 경쟁을 생존 논리로 언급하였다.
1909년 서우학회 회장 이종만(李鍾滿)은 “체육은 국가 자강의 기초라 …… 지금 20세기 경쟁 시대는 우승열패(優勝劣敗)”라 하여, 운동회가 국가 존립의 근간임을 역설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회는 학생들에게 우등과 경쟁을 조장하는 권력의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운동회의 분위기는 이미 경기장 밖에서부터 고조되었다. 경기장에는 초대받은 정부 관료들과 외국인, 기자들이 단상을 메우고, 맞은편에서는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학교별로 나뉘어 경기를 하였다. 일례로 1899년 4월 29일에 개최된 각 어학교 대운동회에서, “학원들은 각기 학교 기호 밑에 차례차례 모여 각색 수건으로 각기 학교를 표하여 혼잡하지 아니한데”(『독립신문』, 1899년 5월 1일자)라 하여 집단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정해졌다. 또한, 이 운동회의 분위기를 돋우는 군악대는 ‘초립 쓰고 황의 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같은 달 열린 소학교 연합 운동회 때는 학생들이 종로에 모여 훈련원으로 가는데, 그 행렬은 학교기로 가름하였다. 즉, 교동은 황, 매동은 자주, 정동은 백, 재동은 옥, 수하동은 홍, 양현동은 녹, 안동은 연녹, 주자골은 분홍, 공립 한성부는 반홍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경기장 밖에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일반인이 운동장에 입장하려면 허입장(許入場), 곧 초대장을 사야 했으며, 태극기가 게양된 문에서 진행 요원의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또한, 이들은 단상을 메우고 있던 정부 관료와 외국인들의 당당한 위세를 수긍하는 사 회적 약자들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소학교 운동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대청 위에는 대한 태극 국기를 정간에다 높이 세우고 그다음에는 동서양 통상 각국의 국기를 차례로 세웠으며 각색 교의를 절차 있게 벌려 놓고 청인(淸人)이 요리를 각색으로 판매하더라. 대청 아래 전면에는 구름 같은 차일(遮日)을 반공(半空)에 높이 치고 각색 교의를 또한, 순서대로 벌렸으며 한계를 정하고 오색으로 만든 작은 기호들은 사면 울타리 가에다 형세 있게 세우고 출입하는 문에는 태극 국기 둘을 모양 있게 세우고 청첩을 상고하여 손님들을 맞아들이더라(『독립신문』 1899년 5월 1일자 논설).
학도들 시험하기는 당나귀 타고 달리기와 씨름하기와 다름질하기와 간뛰엄하기와 학도 열 명씩 좌우에 세우고 줄다리기와 명주덩이같이 쇠로 만든 철공던지기를 취재하여 장원한 학도들을 상을 주고 좋은 연설들도 많이 하였고 또 순검 50명으로 호위하고 군악대를 청하여 풍악을 치며 질탕하게 놀고 돌아왔다더라(『황성신문』 1899년 5월 1일자 잡보).
이 내용에서 운동장 위에는 여러 나라와 대한제국의 국기가 걸리고, 그 아래에는 학교기를 중심으로 소학교 학생들의 위치가 구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학생들과 행사 진행 요원들만 왕래할 수 있는 금줄(울타리)을 경계로 하여 그 외곽에 경찰을 50명이나 배치하였고, 군악대를 청하여 각종 노래를 곁들였다. 그리고 운동장 한 편에는 떡장수, 엿장수, 얼음 장수 등 상인들의 판매점도 깔려 있었다.
운동회 예식은 학생들의 운동, 주민들의 참여, 상품 지급, 애국가 제창, 만세 삼창 등이 일반적이었다. 이렇듯 운동회는 학생들의 교육 활동이라는 성격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대대적인 참여와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관람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주민들이 직접 운동회의 상품을 내놓거나 재정을 원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더불어 정부 관료와 외국 공사, 기자들이 참여하는 국가적 행사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운동회 예식은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운동회는 학교 체육 차원에서 하는 소규모 학교 행사가 아니라, 지역민이 참여한 군중 집회의 일면과 연설회를 통한 개화 의식 고양, 나아가 의례적 행사를 통해 충군애국과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국민 통합의 장이었다. 그러므로 운동회는 사회적 요구를 함축한 실천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사립학교 운동회는 교육 구국 운동의 하나로 굳어진다. 그리고 운동회가 각 사립학교는 물론 관·공립학교 등으로 더욱 확대되어 열리고, 운동회의 부대 행사로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통감부는 학교 체육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기계 체조·곤봉 체조·유희 등을 강조하면서 순수한 운동회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한 연합 운동회에서는 실전을 방불하게 하는 군사 훈련과 제식 훈련이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1908년 5월에 개최된 강화군의 연합 운동회의 면모를 살펴보면 운동회의 의미가 군사적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80여 학교와 인군에 있는 20여 학교를 연합한 학도의 수효는 2,613인이오, 내외국 빈객과 구경하는 사람이 3만 명 이상이라 20여 과정을 각각 나 누어 경쟁하여 …… 일반 학도를 좌우로 나누어 포격하기 시작하는데 적십자대는 각각 양편에 있어 상한 군사를 낫낫이 병원으로 메여 가며 총소리는 연속하여 양진이 서로 진퇴할 즈음에 양편 장관들은 장검을 높이 들고 군병을 지휘하며 망원경을 들어 적진의 형세를 살피더니 한번 호령을 발하매 한편 진중으로서 결사군 일대가 홀연 내달아 음습하더니 적진이 항오(行伍)를 잃고 자상천답하며 패하여 달아나거늘 군악 소리가 태극기 밑에서 훤자하며 손벽을 치고 춤을 추어 한번 큰 성황을 보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17일자 잡보).
이러한 군사적 훈련은 당시 운동회가 지녔던 국권 회복의 실천, 체력 단련, 민족 화합, 민족 정신의 결속을 담은 것이었다. 이처럼 학교 현장에서 운동회는 사회 운동의 하나로 강조되어 갔다. 통감부는 「보통학교령」에 체조 교과를 “신체의 각 부를 균등하게 발육케 하며, 사지의 동작을 기민케 하여 전신의 건강을 보호 증진하고 정신을 쾌활 강의케 하며, 겸하여 규율을 지키고 협동하는 습관을 기름을 요지로 함”으로 설정하였고, 구체적 내용으로는 “처음에는 유희를 적의(適宜)케 하고, 점차 규율적인 동작을 행케 하고 보통 체조를 더 가르치고, 또 협동적 유희를 작(作)케 하되 때에 따라 체조 교수 시간의 일부나 혹 교수 시간 외에 적절한 호외 운동을 행케 함이라.”라고 규정하였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병식 체조가 유희나 호외 운동으로 대체되었고, 협동 정신을 강조하는데, 이는 체조 교과에 있던 저항적 성격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사립학교 시행에 관한 건」에는 통감부가 사립학교의 연합 운동회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즉,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려 세상 사람의 이목만 현황케 하며 또 병식의 훈련과 운동을 열심히 하여 정한 과업을 등한히 버리며 심한 자는 망령되게 대운동회를 설행(設行)하여 수일 혹 십여 일 과업을 폐지하는 일”은 곧 학교에서의 병식 체조와 그 연장선에서 교외 활동으로 열린 운동회를 엄금한다는 것이었다. 통감부의 명분은 “교육이 널리 퍼짐을 해롭게 하고 그 본뜻을 어기는 자이니 이를 학교마다 경고하여 그 폐단을 덜어 버리기에 진력함이 가하다.”라 하여, 대운동회가 교육의 본뜻을 크게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또한, 1910년 학부 차관은 평양의 여러 학교를 둘러보면서 한 연설에서 연합 운동회를 ‘국운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진단하였다.171) 이처럼 통감부는 운동회를 교육의 부실화를 초래할 수 있는 행사로 단정한 것이다. 한편, 이는 민족적 결집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