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1. 서양 과학 기술과의 만남

전화의 보급

[필자] 박진희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때는 1893년 말이지만 상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97년에는 궁내부 주관의 전화 시설이 덕수궁을 중심으로 정무 각 아문과 멀리 인천 감리에까지 개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02년 3월에는 통신원 주관의 전화 사업이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설되고 그해 6월에는 서울, 이듬해 2월에는 인천에서 자석식 교환기에 의한 시내 교환 업무가 개시되었다. 이에 맞추어 국내 전화 규칙이 제정되고 이후 개성·평양·수원 등지에도 전화가 개통되면서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처음으로 공중용 시외 전화가 설치되었다. 이때 전화 가입자는 총 24명이었으며, 그 중 조선인은 두 명에 불과하였다.

전화는 처음 몇 년 동안의 사용 권장에도 불구하고 가입 신청자가 크게 늘지 않았다. 이렇게 초창기에 전화가 호응을 얻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사람들은 전화 통화 자체를 어색하게 여겼다. 점잖은 처지에 어떻게 전화통을 들고 남과 대화를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어른을 전화통으로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기치 못한 사고에 놀라 전화 통화를 멀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낡거나 고장 난 송수화기를 만졌다가 감전되거나 귀를 댔다가 ‘찌’ 하는 벨 소리에 놀란 다음에는 전화 사용을 기피하게 되었다. 심지어 전화통에 귀신이 붙었다고 오해하기도 하였다.

전화가 불필요했던 당시의 생활 여건도 전화 보급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전화를 가질 만한 상류층은 가까운 거리라면 하인들을 시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화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주로 이용되었고, 그 때문에 시내 전화보다 서울과 타 지역 사이의 시외 전화가 먼저 개통되었다.

전화는 도입 후 20∼30년이 지난 후에야 상공인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통신 시설의 미비로 인해 고장이 잦고 교환이 지연되는 일이 자주 빚어졌다. 1920년 7월 『조선일보』의 기사는 전화를 한번 하자면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어도 빨리 나와야 5분 내지 10분이고 그렇지 않으면 30분 내지 1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며 통화의 불편함을 비난하고 있다. 일제는 전화 교환이 지체되는 이유를 숙련되지 못한 조선인 여자 교환수들 탓으로 둘러대면서 재정 투자 부족을 감추려 하였다. 교환수들은 노후한 설비를 숙련된 손놀림으로 대체해야 했기 때문에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창기 전화 교환수>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때는 1893년이었으나 20∼30년이 지난 뒤에야 상공인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전화 교환수들은 대부분 15∼18세의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아 당시로서는 고학력자들이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고달픈 업무는 종종 신문의 가십거리가 되곤 하였다. 손님 욕설, 교환 감독의 꾸중, 거기에 고달픈 귀를 더욱 시달리게 하는 주정꾼의 전화 등등. 이런 기사는 나이 어린 교환수들의 애환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은 겨우 10분에 지나지 않았고 감독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교환대는 구식이었으며 여름에 창문도 열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전화 교환수는 겉으로 보기에 개화된 사회의 새로운 직업, 별천지에서 노는 신선 같았으나 속으로는 엄청난 노동 강도에 시달리는 소외된 노동자였을 뿐이었다.

[필자]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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